다나카 도시코

 

히로시마, 얼굴

다나카 도시코

 

 

집 천장이 뜯기고
지붕이 무너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어요.

“아아, 예쁘네” 하고.

원폭도
방사능도
버섯 구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 나이의 나는

화상을 입어 아파서 울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푸른 하늘을 본 거예요.

집 천장이 뜯기고
지붕이 무너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어요.

“아아, 예쁘네” 하고.

원폭도
방사능도
버섯 구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 나이의 나는

화상을 입어 아파서 울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푸른 하늘을 본 거예요.

 

  • Profile
    Toshiko Tanaka

다나카 도시코
(결혼 전 이름: 하라 가츠코)

1938년(쇼와13년) 10월18일, 히로시마시 가코마치(현재의 나카구 나카지마쵸, 폭심지에서 약 1km)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어머니, 2살, 6살 어린 여동생 둘과 전후에 태어난 남동생 하나로 모두 여섯 가족이었다. 군용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집에서 숙박객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으며 활발하게 자란다.

1945년 3월에 무토쿠 유치원을 졸업하고 혼자서 친척집으로 피난하여 다카타군에 있는 요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부모님은 어린 딸이 걱정되어 5월에 집으로 데리고 와 나카지마 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그러나 그 여름에 가족들은 퇴거를 종용받는다. 우시타 미나미구(지금의 히가시구 우시타와세다, 폭심지에서 약 2.3km )에 있는 친척집으로 세 들어 이사하여 우시타 초등학교로 전학한 것이 원폭투하 1주일 전이었다.

1945년 8월6일, 6살 난 도시코씨는 등교 전에 친구하고 만나기로 한 벚나무 아래에서 피폭하여 화상을 입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고열에 의식을 잃었다. 12살 때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이라고 진단받았다.

구내염이 연이어 생기고 목이 부어 음식을 겨우 삼킬 수 있었다. 매일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권태감에 고통스러웠다.

노보리쵸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학생회장에 입후보하라고 강력하게 권유해도, 생활에 쫓겨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매일 옷을 수선하여 돈을 버는 어머니 일을 도와야 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손님에게 옷을 배달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표현활동에 대한 동경심에 학교신문 동아리의 회장이 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그림이나 디자인의 세계로 진학하리라 결심하고, 4년동안 일하면서 고쿠타이지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1958년에 도쿄의 분카복장학원에 진학하여 디자이너를 목표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후 히로시마에 돌아와 1964년 25살의 나이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시어머니의 권유로 가츠코에서 도시코로 이름을 바꾸고 칠보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연하게 시작한 칠보였지만 금속칠보 작가인 사이토 케이이치씨 밑에서 6년 동안 공부하며 칠보의 재미에 눈을 뜬 도시코씨의 작품은 일본 미술전과 일본 현대미술공예전에서 인정을 받아 단골작가가 된다. 도쿄예술대학과 뉴욕아트스쿨에서 단기유학도 하면서 늘 향상심을 가지고 활동한다.

1981년 히로시마 시장은 히로시마를 방문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도시코씨의 작품을 증정한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피스 보트에 4번 승선하여 세계를 여행하면서 피폭체험을 증언한다.

2016년에는 자택을‘평화교류 스페이스’로 개방하고, 현재 칠보작가로서 ‘우주를 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프리랜서 작품활동을 한다. 피폭자로서는 핵무기폐기국제캠페인(ICAN), 히바쿠샤 스토리즈, 일본 원자수소폭탄피해자 단체협의회(니혼 히단쿄) 활동에도 공헌. 피폭증언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년 시절

아버지(맨 왼쪽)가 출정하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가운데가 어머니,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가 도시코씨. 하라 집안의 장녀로서 사랑받았다.

생후 9개월된 도시코씨

2살 때의 도시코씨

도시코씨의 본가는 히로시마시 가코마치초(현재의 나카구 나카지마초)에서 군인을 위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소집된 군인이 우지나 항구에서 출정하기 전날 밤에 머무는 숙소였다. “군인들은 모두 고향에 가족을 두고 왔겠죠. 그래서 어린 내가 자기 아이나 친척 아이하고 겹쳤을 거에요. 아주 귀여워해 주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근처에 있던 무도 훈련장에서 밤 늦게까지 연습하는 모습을 보다가 혼나기도 하고 강가에서 바지락을 캐며 놀기도 했다. 전쟁 중의 힘든 생활 속에서도 조그만 일상이 있었다. 1945년 여름, 도시코의 집 주변이 건물소개로 철거하게 되어 퇴거를 종용받았다. 가족이 우시다 미나미구(현재의 히가시구 우시타와세다)로 이사한 것은 원폭투하 1주일 전이었다. 만약 그대로 폭심지에서 약 1km 떨어진 가코마치에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삶과 죽음은 우연으로 갈린다.

 

피폭하고 살아남은
6살 때의 여름

1945월 8일 아침, 당시 6살이었던 도시코씨는 벚나무 아래에서 함께 등교할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적기다!”하고 소리쳐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섬광으로 눈 앞이 새하얘졌다. 8시15분 원자폭탄이 투하된 순간,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오른팔, 머리, 왼쪽 목 뒤쪽으로 화상을 입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간신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바짝 불에 타고 얼굴과 팔이 새까매지고 옷은 너덜너덜해졌다. 너무 변한 도시코씨의 모습에 어머니는 자기 아이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고통과 공포에 눈물을 흘리면서 문득 구멍이 뚫린 집 지붕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이 보였다.“아, 예쁘다. 그 순간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내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의 푸른 하늘이 아직도 도시코씨의 뇌리에 박혀있다. 화상으로 생긴 물집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날 밤 도시코씨는 고열로 의식을 잃었다. 며칠 후에 정신이 들고 보니 온 동네가 시체를 화장하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1945년 3월 유치원 졸업 때의 기념사진.
도시코씨는 현재 평화기념자료관이 있는 무토쿠 유치원에 다녔다.
이 사진을 찍고 5개월 후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도시코씨는 함께 찍은 친구 대부분이 폭사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 아파한다.

8살 무렵의 도시코씨. 원자폭탄의 방사능은 도시코씨의 작은 몸을 위협했다. 12살 때 백혈구의 수치이상으로 진단되어 매일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화상도 안 입은 친구가 죽어가는 거예요. 당시에 피폭 영향을 받는 곳은 폭심지에서 2km 이내라고 하며, 내가 있었던 우시타 지구는 약 2.3km 떨어졌다고 300m의 차이로‘원폭 탓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내가 ‘칠보’를 시작하다니

인생이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눈 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의 꿈, 목표, 사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비록 형태가 바뀌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내가 ‘칠보’를 시작하다니

인생이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눈 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의 꿈, 목표, 사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비록 형태가 바뀌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동경으로 상경하여
디자인의 최첨단을 접하게 된 젊은시절

중학교 3학년 때의 도시코씨

매년 학년 말에 수료식이 있었다.
당시에 고시노 준코, 다카다 겐조, 미야케 잇세이도 재학했다고 한다.

도시코(왼쪽)씨는 분카복장학원 재학중에 1년동안 휴학하고 대만 제약회사의 캠페인걸이 되어 4개월간 대만 각지를 다닌다. 그 후 홍콩, 베트남, 태국, 싱가폴을 다니면서 일반시민이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시절에 호기심과 적극적인 성격으로 아시아를 혼자 여행하는 경험을 했다.

전쟁 후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야간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낮에 일하며 저축한 돈으로 동경에 있는 분카복장학원에 진학하여 디자인을 공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저명한 디자이너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건의를 받았지만, 저축한 돈이 바닥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히로시마에서 맞선 얘기가 나와 1964년 25살에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전업주부로 육아에 쫓기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칠보교실을 권유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칠보작가인 사이토 게이이치씨를 만나면서 칠보의 가능성을 알게 된다. 그 후 도시코씨는 작품제작에 몰두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펼쳤다. 전통공예를 중시했던 스승으로부터 건방지다는 말도 들었지만 연달아 수상을 하면서 활약의 장을 넓혀간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커다란 소포가 배달된다. “사이토선생님의 소중한 도구와 편지가 들어있었어요.‘도시코가 제일 훌륭했어요’라고… 인정해 주셨던 거죠.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어요.”

귀향해서 시작한
칠보의 세계에 빠져들다.

칠보작가로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978년부터 일본현대공예전에서 연속으로 입선하고, 1979년에는 일본미술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입선하면서 합계 16회 입선이라는 빛나는 공적을 쌓은 도시코씨. 1981년에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히로시마시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을 증정한다. 또한 같은 해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협회의 스에이시 가즈씨로부터 어떤 요청을 받았다. “재미피폭자가 피폭자수첩을 취득하려면 히로시마 의사단을 미국으로 불러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해요. 어떻게 안 될까요?”하고.
당시에 히로시마시 국제교류과장의 협력으로 로스앤젤레스의 미일문화회관에서 미일친선칠보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도시코씨는 칠보작가를 대표해서 전국의 작가한테 작품을 모으고 자신 또한 출품해서 전시판매를 성사시켰다. 약 2주간의 전시기간으로 얻은 수익금 전액은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협회에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도시코씨의 예술활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평화활동으로 이어졌다.

도시코씨의 은사이며 칠보작가인 사이토 게이이치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1981년 미국에서 개최된 미일친선칠보전에서. 오른쪽에서 3번째가 도시코씨.
‘맨발의 겐’ 영문판 200권과 원폭 관련 서적 400권을 가지고 가서 기증했다. 미국 피폭자협회의 회원이 각 도서관에 기부해 주셨다”

미국의 칠보전문지 ‘Glass on Metal’ 1994년4월호에는 다나카 도시코 특집이 실렸다.

■칠보란?
금속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을 구워서 붙여 장식하는 기법 및 그 공예품. 일반적으로는 액세사리 제작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도시코씨는 칠보에 스텐레스를 조합한 대형 벽면작품을 고안하여 참신한 작품을 연달아 세계에 소개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세계가 이어져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마치 작은 배
우리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승무원입니다.

어느 장소에서의 다툼은 분명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보유해서도 안됩니다..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지구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피폭자로서의 진심 어린 소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세계가 이어져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마치 작은 배
우리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승무원입니다.

어느 장소에서의 다툼은
분명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보유해서도 안됩니다.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지구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피폭자로서의 진심 어린 소원입니다.

 

 

피스보트로 세계로 나아가
70살에 시작한 피폭증언

 

피스보트에 승선하고 베네수엘라에서의 만남을 통해 피폭증언 활동을 시작한 도시코씨.
한번 열린 마음의 문에서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생각과 말이 계속 넘쳐나왔다.

도시코씨는 2005년에 옆에서 항상 지켜주었던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2007년 어느 날, 한 신문 광고에서 피스보트를 알게 되었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해서 바로 응모하기로 한다.항해 도중에 과달카날과 라바울에도 정박했다. 그곳은 도시코씨의 친정 부모가 운영했던 여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군인들이 떠난 곳이었다. 자신을 귀여워해주었던 군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던 중에 동승자와 함께 위령제를 지냈다.
대부분의 다른 피폭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 당시에는 피폭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도시코씨. 그러나 전환기가 찾아온다. 2008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였다. 베네수엘라의 한 시장님이 “피폭자들은 원자폭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말할 의무가 있다” 고 건넨 이 말이 도시코씨를 변화시켰다. 남미의 TV방송국 테레슬이라는 위성방송을 통해 도시코씨는 베네수엘라 땅에서 70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피폭 증언을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피폭증언활동을 개시하여 현재까지80여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학생, 과학자, 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피폭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평화는 단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2010년 5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재검토 회의에 맞춰 수백명의 피폭자가 미국으로 날아갔다. 일부는 남아서 25개 지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증언활동을 했다. 마침 NPO히바쿠샤 스토리즈의 일원으로 초대되어 뉴욕에 머무르고 있었던 도시코씨는 별도로 외국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퀸즈 지구의 공립고등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 중에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군에게 친척이 살해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도시코씨는 “증오를 증오로 돌려주는 복수의 끈을 끊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용서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도시코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고, 학교 선생님이 놀랄 정도로 내면적으로도 변화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적‘기적은 날개를 타고’ (미나모토 가즈코 집필/고단샤 출판)에도 소개되었다.

“원폭으로 피폭당하고 화상을 입고 학급 친구들을 잃었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미국을 용서할 수 있는 겁니까?”하고 물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소년. 도시코씨와의 만남이 그의 내면을 크게 흔들었다.

처음 만나고 나서 몇 년 후, 성장한 소년과 그의 은사.
이 책에 도시코씨와의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자택 아뜰리에를 개방하고
전 세계 사람을 수용하다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의 손자와 그 가족과 함께

에놀라 게이 의 승무원인 제이콥 베서의 손자 아리 베서씨와 함께

피폭증언을 시작하고 나서 칠보 제작에도 변화가 생겼다.“화조풍월,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작품 어딘가에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표현하는 사인과 같은 것을 넣고 있다”고 하는 도시코씨. 자택 1층을 ‘평화 교류 스페이스’로 개방하고 벽면은 자신의 칠보작품으로 장식했다.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에는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손자인 클리프턴 트루먼 대니얼씨와 그의 가족이 방문했다. “다니엘씨의 부인과 함께 작은 액세서리를 만들었는데 아주 기뻐했어요. 이게 평화가 아니겠어요?” 하고 눈을 반짝였다. 증오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중학생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도시코씨. 그 바탕에는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다. “해외에서 친구를 사귀세요. 친구가 생기면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폭탄을 떨어뜨려버려라’ 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확장되는 평화의 고리
미국의 일본 가레산스이정원
모래판에 물결무늬를 디자인

마틴 맥켈러씨(플로리다대학의 한미술관, 가레산스이 정원관리자)가 츄코쿠신문사의 가나자키 유미씨와 상담하고 나서 도시코씨와의 콜라보레이션 안이 부상되었다. 2020년 9월21일 국제평화데이에 맞춰 미국 국내 5곳의 가레산스이정원에서 도시코씨가 디자인한 도안을 바탕으로 모래판에 물결 무늬를 작업했다. 그 모양은 영상작품으로도 제작되었다. 2021년부터는 매년 북미일본정원협회의 공식행사가 되었고 개최지도14곳으로 늘었다. 텍사스주의 포트워스식물원과 원폭을 개발한‘맨해튼 프로젝트’의 거점이었던 테네시주 오크리지의 정원을 포함한 9개 주에 있는 정원과, 전쟁 중에 일본인강제수용소가 있었던 캘리포니아주의 만자나 국가지정 사적지 등 가레산스이가 없는 2곳도 참가하여 평화를 희망하는 조용한 표현활동이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획에 대한 아이디어는 플로리다대학의 한미술관(Harn Museum of Art)의 마틴 맥켈러씨로, 1998년에 교토를 방문했을 때 수행여행 온 학생에게 평화에 관한 설문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평화를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하고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시코씨가 직접 그린 디자인화. 실제 정원의 면적을 축소하여 계산한 다음 평화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본어 문자 へ(he), い(i), わ(wa) 를 주제로 디자인해서 그렸다.

 

 

 

 

여섯 살이었던 그날

원폭이 가져온 압도적인 파괴 속에서
울타리 틈으로 살짝 보인 푸른 하늘이

지금도 나를 격려하고
이끌어 줍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고인이 된 동급생들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다하고 싶습니다.

핵무기는 이 지구에 필요없어! 라고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여섯 살이었던 그날

원폭이 가져온 압도적인 파괴 속에서
울타리 틈으로 살짝 보인 푸른 하늘이

지금도 나를 격려하고
이끌어 줍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고인이 된 동급생들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다하고 싶습니다.

핵무기는 이 지구에 필요없어! 라고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평화교류의 장소로써 개방하고 있는 자택 1층 ‘평화 교류 스페이스’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에서는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우주적 시야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를 방문하고 인종을 뛰어 넘는 교류를 거듭한 경험이 작품에 투영되어 깊이를 더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평화교류의 장소로써 개방하고 있는 자택 1층 ‘평화 교류 스페이스’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에서는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우주적 시야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를 방문하고 인종을 뛰어 넘는 교류를 거듭한 경험이 작품에 투영되어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요시모토 아야・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