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고코

 

히로시마, 얼굴

곤도 고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폭심지에서 1.1km
원자폭탄이 작렬하고
폭삭 무너져버린 히로시마 나가레카와 교회 근처 목사관.

생후 8개월이었던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을 면한 나의 투쟁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거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폭심지에서 1.1km
원자폭탄이 작렬하고
폭삭 무너져버린 히로시마 나가레카와 교회 근처 목사관.

생후 8개월이었던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을 면한 나의 투쟁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거다.

 

  • Profile
    Koko Kondo

곤도 고코
(결혼 전 이름:다니모토 고코)

1944년(쇼와 19년) 11월 20일, 히로시마 나가레카와교회 목사였던 다니모토 기요시씨와 치사씨의 장녀로 히로시마시 노보리쵸에서 태어난다. 1945년 8월 6일, 생후 8개월 때 폭심지로부터 1.1km 떨어진 교회 목사관에서 피폭하고 무너진 건물 아래에 깔렸지만 어머니가 두 팔로 감싸 안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후, 아버지는 상처 입은 피폭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어린 고코씨는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거의 집에 없는 아버지에게 고독감을 많이 느꼈다. 동시에 갈 곳도 없이 상처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교회를 방문하는 원폭 고아와 원폭으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원폭 처녀’라고 불린 여성들과 교류했다. 그들의 고뇌를 보면서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한편, 아버지를 통해 피폭지인 히로시마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는 미국인의 존재감도 느끼며 자랐다. 원폭 투하 후, 저널리스트인 존 허시씨(1914-1993)는 히로시마를 방문해서 다니모토 목사를 포함한 6명의 피폭자를 취재하고 나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히로시마’를 출판해 미국에‘다니모토 기요시’라는 이름을 알렸다. 다니모토 목사의 평화활동을 처음부터 지원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씨(1892-1973). 그들을 통해 다니모토 목사와 알게 된 히로시마 피스센터협력회의 일원인 노먼 커즌즈씨(1915-1990). 평화활동가 플로이드 슈모씨(1895-2001). 어린 고코씨는 그들에게“Koko”라고 불리며 귀여움 받았다.

중학생 때, 정기건강검진을 위해 방문한 ABCC(원폭 상해조사위원회, 현 방사선영향연구소)에서 가운을 벗고 벌거벗은 상반신을 몇몇 어른들 앞에서 노출해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을 경험하고, 피폭자’가 아닌 삶을 찾아 혼자 도쿄의 오비린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5년 반 동안 미국에 체류하던 중에 펄 벅씨와 친교를 쌓고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66년에 센테너리 여자 전문대를 졸업하고, 1969년에 아메리칸대학을 졸업했다. 같은 해 귀국 후에는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잠시 비서로 일했다.

30살에 훗날 목사가 되는 곤도 야스오씨와 결혼했다.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가 나가레카와 교회에서 운영하는‘히로시마 피스센터’ 일을 돕기 위해 부부가 함께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이사했다. 그 후, 히로시마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통역을 하거나 국내외에서의 피폭 체험을 증언하는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1996년부터는 매년 리쓰메이칸대학과 모교인 아메리칸대학의 미국과 일본 대학생들을 데리고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평화식전에 참석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을 안고 국내에서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을 해외의 양부모와 연결해 주는‘국제양자결연’에 반세기 동안 힘을 쏟는가 하면 세계 어린이와 함께 평화를 호소하는 미국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도 맡게 된다.

 

유년시절―피폭자 구제에 분주한 다니모토 목사의 딸로서

 

유년시절

―피폭자 구제에 분주한
다니모토 목사의 딸로서

▲원폭 투하 후의 나가레카와 교회.
고코씨는 히로시마 거리 전체가 괴멸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원폭 투하 후의 나가레카와 교회.
고코씨는 히로시마 거리 전체가 괴멸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9년 10월 1일 미나미마치 평화주택 완성 기념사진.
플로이드 슈모씨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손으로 건설되었다.
중앙에 있는 슈모씨에게 안겨있는 고코씨▼


플로이드 슈모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와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은 모금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피폭자를 위한 주택과 집회소 건설을 추진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949~1953년에 21호를 건설하고, ‘히로시마의 집’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플로이드 슈모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와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은 모금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피폭자를 위한 주택과 집회소 건설을 추진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949~1953년에 21호를 건설하고, ‘히로시마의 집’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1949년 10월 1일 미나미마치 평화주택 완성 기념사진.
플로이드 슈모씨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손으로 건설되었다.
중앙에 있는 슈모씨에게 안겨있는 고코씨

원폭투하 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원 물자를 정리하는 다니모토 목사와 동료들. 어린 고코씨의 모습도 있다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깊이 교류했던
노먼 커즌스 씨에게 안긴 히로코씨▼

▲원폭투하 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원 물자를 정리하는 다니모토 목사와 동료들. 어린 고코씨의 모습도 있다

 


노먼 커즌스

미국작가, 편집자, 언론인.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의 일원으로서 미국인의 양부모가 원폭고아에 대한 정신적 서포트를 위해 ‘정신적 입양 결연’ 과 ‘원폭 처녀’의 도미 치료 등의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64년 히로시마시 특별명예시민.


노먼 커즌스

미국작가, 편집자, 언론인.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의 일원으로서 미국인의 양부모가 원폭고아에 대한 정신적 서포트를 위해 ‘정신적 입양 결연’ 과 ‘원폭 처녀’의 도미 치료 등의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64년 히로시마시 특별명예시민.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깊이 교류했던
노먼 커즌스 씨에게 안긴 히로코씨

▲가족끼리 찍은 기념사진.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씨, 어머니 치사씨, 동생들과 함께. 오른쪽 끝이 고코씨. 막내 남동생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전후 나가레카와 교회가 재건되면서 부지 안에 나가레카와 유치원도 병설되었다

1951년에 발족한‘원폭상해자 갱생회’에서는 피폭자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다니모토 목사의 호소로 기부받은 재봉틀은 원폭에 의한 화상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에게 양재로 자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고코씨의 앨범에서.
영어로 쓴‘KOKO’와 가슴에 십자가가 있는 인물화로 고코씨가 자란 환경을 엿볼 수 있다

 

▲1951년에 발족한‘원폭상해자 갱생회’에서는 피폭자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다니모토 목사의 호소로 기부받은 재봉틀은 원폭에 의한 화상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에게 양재로 자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히로시마 피스센터’ 와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


1946년‘더 뉴요커’에 발표된 존 허시의 르포‘히로시마’로 인해 다니모토 기요시씨의 존재는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다니모토씨는 2년 후인 1948년 9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15개월 동안 31주 256개 도시에서 강연하며, 히로시마의 참상과 평화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강연 중에 다니모토씨가 호소한 것은 피폭자 케어와 평화 발신의 거점‘히로시마 피스센터’의 필요성이었다. 이 호소에 소설가이며 사회 활동가였던 펄 벅씨가 동조해 주었고, 덕분에 알게 된 노먼 커즌스씨의 협력으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 피스센터’, 뉴욕에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가 발족되었다. 협력회의 지원 하에 원폭 고아를 위한 ‘정신적 양자 입양운동’과‘원폭 처녀’가 도미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했다. 센터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다니모토 기요시 평화상 수여, 세계평화변론대회 개최를 통해 평화의 고귀함을 알리고 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워하고 있었다.

어리고 젊은 언니들의 부드러운 피부를
검붉게 태운 원자폭탄
그리고 그것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그 비행기
정확히 겨냥한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언젠가 내가 원수를 갚아 주마!”

그리고 10살의 나는 ‘그’를 만났다.

돌이킬 수 없는 죄에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에게

아아 신이시여!
그 순간 강하게 쥔 내 주먹이 풀려버린 겁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워하고 있었다.

어리고 젊은 언니들의 부드러운 피부를
검붉게 태운 원자폭탄
그리고 그것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그 비행기
정확히 겨냥한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언젠가 내가 원수를 갚아 주마!”

그리고 10살의 나는 ‘그’를 만났다.

돌이킬 수 없는 죄에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에게

아아 신이시여!
그 순간 강하게 쥔 내 주먹이 풀려버린 겁니다.

 

 

  • Story.1
    Koko Kondo

“고코, 고코”
고코씨는 어릴 때 교회로 오는 젊은 언니들에게 동생처럼 귀염받으며 자랐다. 당시 4살이었던 고코씨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다.
“눈 코 입술 턱 … 언니들 얼굴에 너무 심한 켈로이드가 있었어. 어린 나는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 어디를 봐야 좋을지 몰랐던 거야”
여성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점 그들의 몸을 망가뜨린 원폭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다.
“원폭을 떨어뜨린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내가 복수를 할 거야”

그로부터 6년 후인 1955년 5월. 10살이 된 고코씨는 뜻하지 않게 그 때를 맞이한다.
그것은 ‘원폭 처녀’의 켈로이드 치료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히로시마 피스 센터 협력회의 제안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TV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었다.

스크린이 활짝 열리며 스튜디오에 등장한 사람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백인 남성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어머니에게 물었다.
“고코, 저 사람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부조종사야”
이 사람이야말로 고코씨의 오랜 ‘숙적’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기 ‘에놀라 게이’의 전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였다.
이날 방송의 최대 볼거리로 피폭자 구제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와 원폭을 투하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인 캡틴 루이스와의 대면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줄곧 미워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다. 이 사람만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코씨는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고코씨의 귀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다.
“신이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My God, What have we done?). 나는 원폭을 투하하고 바로 이 말을 비행일지에 썼습니다”
목메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고코씨는 그 눈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적이었던 이 사람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크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내 안에도 악은 있다. 미워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나약함이다” 고코씨가 증오를 극복한 순간이었다.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 때 연설에서 “어떤 여성은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를 용서했다. 정말로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고코씨와 캡틴 루이스와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 Story.1
    Koko Kondo

“고코, 고코”
고코씨는 어릴 때 교회로 오는 젊은 언니들에게 동생처럼 귀염받으며 자랐다. 당시 4살이었던 고코씨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다.
“눈 코 입술 턱 … 언니들 얼굴에 너무 심한 켈로이드가 있었어. 어린 나는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 어디를 봐야 좋을지 몰랐던 거야”
여성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점 그들의 몸을 망가뜨린 원폭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다.
“원폭을 떨어뜨린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내가 복수를 할 거야”

그로부터 6년 후인 1955년 5월. 10살이 된 고코씨는 뜻하지 않게 그 때를 맞이한다.
그것은 ‘원폭 처녀’의 켈로이드 치료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히로시마 피스 센터 협력회의 제안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TV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었다.

스크린이 활짝 열리며 스튜디오에 등장한 사람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백인 남성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어머니에게 물었다.
“고코, 저 사람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부조종사야”
이 사람이야말로 고코씨의 오랜 ‘숙적’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기 ‘에놀라 게이’의 전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였다.
이날 방송의 최대 볼거리로 피폭자 구제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와 원폭을 투하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인 캡틴 루이스와의 대면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줄곧 미워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다. 이 사람만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코씨는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고코씨의 귀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다.
“신이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My God, What have we done?). 나는 원폭을 투하하고 바로 이 말을 비행일지에 썼습니다”
목메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고코씨는 그 눈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적이었던 이 사람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크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내 안에도 악은 있다. 미워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나약함이다” 고코씨가 증오를 극복한 순간이었다.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 때 연설에서 “어떤 여성은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를 용서했다. 정말로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고코씨와 캡틴 루이스와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무대 위에 단 한 사람
움츠러드는 나에게 라이트가 켜진다

저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운 벗어’

천 한 장으로 된 속옷차림
남의 눈이 들여다본다
굴욕, 분노, 억울함, 슬픔···

내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그때 결심했어
이제 그만! 히로시마를 벗어나자!
목숨이 있는 한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미국은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목적으로 1947년에 설립한 원폭 상해 조사위원회(ABCC, 현 방사선 영향 연구소)는 어른뿐만 아니라 젖먹이와 유아의 건강 상태도 추적 조사했다. 고코씨는 유소년기부터 1년에 1~2회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중학생 때 평소와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강당 같은 넓은 방에서 의사로부터 천 한 장의 속옷차림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강한 라이트를 받고 몇몇 어른들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몸을 살펴보니 고코씨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신이시여, 저를 지금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아! 히로시마를 떠나고 싶다···!”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고코씨는 이 굴욕적인 체험을 오랫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 단 한 사람
움츠러드는 나에게 라이트가 켜진다

저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운 벗어’

천 한 장으로 된 속옷차림
남의 눈이 들여다본다
굴욕, 분노, 억울함, 슬픔···

내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그때 결심했어
이제 그만! 히로시마를 벗어나자!
목숨이 있는 한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미국은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목적으로 1947년에 설립한 원폭 상해 조사위원회(ABCC, 현 방사선 영향 연구소)는 어른뿐만 아니라 젖먹이와 유아의 건강 상태도 추적 조사했다. 고코씨는 유소년기부터 1년에 1~2회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중학생 때 평소와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강당 같은 넓은 방에서 의사로부터 천 한 장의 속옷차림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강한 라이트를 받고 몇몇 어른들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몸을 살펴보니 고코씨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신이시여, 저를 지금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아! 히로시마를 떠나고 싶다···!”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고코씨는 이 굴욕적인 체험을 오랫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 Story.2
    Koko Kondo

도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고코 씨는 5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노벨상 작가인 펄 벅씨와 깊이 교류를 하게 된 것도 이 유학 기간중의 일이었다. 아버지 기요시씨가 설립한 ‘히로시마 피스센터’의 찬동자였던 펄 벅 씨는 자신도 전쟁고아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면서 6.25전쟁에서 미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사재를 털어가며 동분서주했다. “어떤 사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빛날 수 있는 기적이다” 펄 벅씨의 이러한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고코씨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친구들도 만나며 이국 땅에서 충실한 청춘시절을 보냈던 고코씨였지만, 졸업을 눈 앞에 둔 대학 4학년 때 다시 히로시마의 속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현지에서 만난 미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고코씨는 ABCC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때문에 “히로시마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안고 있어서 그와의 약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약혼자의 삼촌이고 의사가 둘 사이에 ‘NO’를 들이댄 것이다.
“히로시마 폭심지 옆에서 피폭한 처자는 정상적인 아이를 낳지 못할 거야”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끝까지 따라다니는 히로시마(ヒロシマ).
결국, 약혼은 파혼하고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고코씨였지만, 뇌리 한편으로는 그‘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었던 얼굴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던 언니들.
화상으로 달라붙은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몸이 되어 약혼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됐어”라고 했던 그 젊고 다정한 여성들.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든데 언니들은 더 힘들었겠다···”
그녀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다가가게 된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도 있고 해서 대학 졸업 후에 일본으로 귀국하고 잠시 도쿄에서 근무한 후, 아버지 기요시씨의 “히로시마에서 평화 활동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바람도 있어 30살에 결혼한 남편과 함께 1976년에 귀향하게 된다.
그 무렵에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대한 거부감은 희미해졌다.
“평화활동에만 분주할 뿐 딸자식인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서운함으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도망다니고 원폭과 마주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수 많은 만남과 확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고코씨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도망치지 않겠어. 이 땅에 태어난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고코 씨는 현재 결혼하고 나서 몇 년 후에 목사가 된 남편과 효고현 미키시의‘미키 시지미교회’에서 지내면서 국내외로 핵 폐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다.

  • Story.2
    Koko Kondo

도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고코 씨는 5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노벨상 작가인 펄 벅씨와 깊이 교류를 하게 된 것도 이 유학 기간중의 일이었다. 아버지 기요시씨가 설립한 ‘히로시마 피스센터’의 찬동자였던 펄 벅 씨는 자신도 전쟁고아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면서 6.25전쟁에서 미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사재를 털어가며 동분서주했다. “어떤 사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빛날 수 있는 기적이다” 펄 벅씨의 이러한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고코씨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친구들도 만나며 이국 땅에서 충실한 청춘시절을 보냈던 고코씨였지만, 졸업을 눈 앞에 둔 대학 4학년 때 다시 히로시마의 속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현지에서 만난 미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고코씨는 ABCC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때문에 “히로시마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안고 있어서 그와의 약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약혼자의 삼촌이고 의사가 둘 사이에 ‘NO’를 들이댄 것이다.
“히로시마 폭심지 옆에서 피폭한 처자는 정상적인 아이를 낳지 못할 거야”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끝까지 따라다니는 히로시마(ヒロシマ).
결국, 약혼은 파혼하고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고코씨였지만, 뇌리 한편으로는 그‘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었던 얼굴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던 언니들.
화상으로 달라붙은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몸이 되어 약혼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됐어”라고 했던 그 젊고 다정한 여성들.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든데 언니들은 더 힘들었겠다···”
그녀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다가가게 된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도 있고 해서 대학 졸업 후에 일본으로 귀국하고 잠시 도쿄에서 근무한 후, 아버지 기요시씨의 “히로시마에서 평화 활동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바람도 있어 30살에 결혼한 남편과 함께 1976년에 귀향하게 된다.
그 무렵에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대한 거부감은 희미해졌다.
“평화활동에만 분주할 뿐 딸자식인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서운함으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도망다니고 원폭과 마주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수 많은 만남과 확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고코씨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도망치지 않겠어. 이 땅에 태어난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고코 씨는 현재 결혼하고 나서 몇 년 후에 목사가 된 남편과 효고현 미키시의‘미키 시지미교회’에서 지내면서 국내외로 핵 폐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내 안의 ‘히로시마(ヒロシマ)’를 안고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의 모습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의 모습

 

프로그램 출연 후,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친교가 깊었던 펄 벅씨의 저택에 머물렀을 때의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펄 벅씨, 오른쪽 끝이 고코씨▼


펄 벅

미국인 작가. 어린 시절부터 전반생을 중국에서 보내고 소설 ‘대지’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49년 고아들을 위한 시설 ‘웰컴 하우스’를 개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수많은 양자입양을 시작했다.


펄 벅

미국인 작가. 어린 시절부터 전반생을 중국에서 보내고 소설 ‘대지’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49년 고아들을 위한 시설 ‘웰컴 하우스’를 개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수많은 양자입양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출연 후,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친교가 깊었던 펄 벅씨의 저택에 머물렀을 때의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펄 벅씨, 오른쪽 끝이 고코씨

▲오비린 고등학교 시절. 오른쪽이 고코씨

노보리쵸 중학교 시절. 왼쪽이 고코씨

▲노보리쵸 중학교 시절. 왼쪽이 고코씨

▲미국,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 재학 중의 고코씨

◀미국,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 재학 중의 고코씨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눈을 돌리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딸들과 함께

▲남편과 딸들과 함께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 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으로 활동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 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으로 활동

 

존 허시씨가 피폭 후의 히로시마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책‘Hiroshima’를 손에.
이 책에 아버지 다니모토목사와 고코씨도 등장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강연 의뢰를 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두 모교,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과
아메리칸대학 학교정보지에 고코씨 특집과 히로시마(ヒロシマ) 특집이 실리다

▲2018년 사회에 혁신적 영향을 준 인물에게 수여되는
‘Tribeca Disruptive Innovation Award’를 수상

▲존 허시씨가 피폭 후의 히로시마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책‘Hiroshima’를 손에.
이 책에 아버지 다니모토목사와 고코씨도 등장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강연 의뢰를 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미국 미주리주의 웹스터 대학교에 초청되어 연설했다.

 

 

 

  • Story.3
    Koko Kondo

전쟁 중에 태어나 특별한 사정을 안게 된 아이들의 권리 옹호에 앞장 선 펄 벅씨와 불에 타 들판이 된 히로시마에서 ‘정신적 입양 결연’ 활동에 온 힘을 다한 아버지 기요시씨에게 이끌리듯이 고코씨는 50년 정도 전부터 미국의 대학에서 배운 유아교육과 아동 심리학, 법률 지식을 살려 ‘국제 입양 결연’(※1) 을 중개하는 사무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고코, 장래에 네가 어른들의 희생된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줬으면 좋겠어”
한 사람이라도 더 어린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제2의 어머니.
고코씨는 펄 벅씨의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학대를 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맡아 함께 식사를 하거나 때로는 같이 목욕을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차분히 마주하고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런 시간을 함께하고 생각에 생각을 한 거듭한 결과, 그 아이에게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에는 입양을 원하는 해외의 양부모에게 아이들을 소개한다고 한다.
“입양보낸 아이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어. 모두 소중한 내 아이야”
몇 년이 지나도 보금자리를 떠난 아이들로부터 ‘안티 고코’로 생각되고 있는 고코씨의 뇌리에는 늘 어릴 적 가까이서 보았던 원폭 고아와 상처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있다.

“유아 때 피폭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의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왔어. 이것은 그 보답. 도움을 청하는 이 아이들은 버섯 구름 아래에서 울부짖었던 내 모습이지”
고코씨 또한, 지금까지 두 여자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키웠다.
“딸들은 나의 자랑이야. 두 아이와의 만남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Koko is our child.”

이렇게 말하며 어린 나를 아껴주었던
많은 훌륭한 어른들

친족과 같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의 고귀함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지.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 메워주는 마음.
person to person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면
잘못이 되풀이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Koko is our child.”

이렇게 말하며 어린 나를 아껴주었던
많은 훌륭한 어른들

친족과 같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의 고귀함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지.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 메워주는 마음.
person to person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면
잘못이 되풀이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이케다 에미・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