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시타 히로무

 

히로시마, 얼굴

모리시타 히로무

 

 

결혼하고 처음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압도당했습니다.

눈도 뜨지 않은 듯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딸이
필사적으로 젖가슴에 매달리는
그 생명력에

그리고 딸이 잠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아이가
오버랩되어 보였던거죠.

그때 내 안에 있던 강한 생각이
북받쳐 올라왔어요.

이제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을 해야 한다고.

결혼하고 처음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압도당했습니다.

눈도 뜨지 않은 듯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딸이
필사적으로 젖가슴에 매달리는
그 생명력에

그리고 딸이 잠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아이가
오버랩되어 보였던거죠.

그때 내 안에 있던 강한 생각이
북받쳐 올라왔어요.

이제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을 해야 한다고.

 

  • Profile
    Hiromu Morishita

森下 弘 (모리시타 히로무)

1930년(쇼와 5년) 10월 26일 도요타군 나카노무라(현 오사키 가미지마쵸)에서 출생. 부모님, 조부모님, 2살, 7살 어린 두 여동생과 함께 사는 일곱 가족이었다. 4살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히로시마시 오시바진죠초등학교로 전근가게 되어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했다. 일본은 쇼와 대공황을 거쳐 청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년)에 돌입하여 군국주의적인 전시색으로 물든 세상에서 자라게 된다. 하쿠시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히로시마제일중학교(현 히로시마 고쿠타이지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농촌 근로봉사, 히로시마항공, 도요공업에 동원되어 공부 대신 오로지 일만 하게 된다.

제일중학교 3학년이던 1945년 8월 6일 폭심지에서 1.5㎞ 떨어진 건물소개 작업 중 갑자기 섬광이 번쩍하면서 피폭되었다. 얼굴과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어머니는 니시하쿠시마쵸 집에서 건물에 깔려 불에 타 죽었다. 아버지는 미츠비시 공장(출장처인 구사츠의 절), 큰 여동생은 구두공장(미사사)에서 피폭되었지만 무사했고, 작은 여동생은 이무로에 소개해 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날, 가와우치무라(현 아사미나미구)에 있는 지인의 집에 도착해 약 2개월 동안은 화상 치료를 했다. 10월이 되어서는 할머니가 피난간 미부쵸(현 야마가타군 기타히로시마쵸)의 삼촌 집에서 요양을 하고, 다음 해인 1946년 1월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기온의 기숙사로 옮겨 그 여름에 얼굴과 목에 있는 켈로이드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데이신병원에서 두 번의 수술을 받게 된다.

사춘기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다정함과 낭만과 같은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1948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이듬해 학제개편으로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학중 결핵을 앓아 요양과 휴학을 반복하면서도 시를 쓰고 소설을 집필하는 창작활동에 몰두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나날을 달랬다.
1955년 봄,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폭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립고등학교의 서예교사가 된 후에도 피폭체험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1961년에 결혼해서 2년 만에 태어난 큰 딸이 젖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강력한 생명력을 느끼고 “다시는 아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고 피폭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된다.

1964년 바바라 레이놀즈씨(나중에 평화단체 월드 프렌드십 센터를 설립, 1990년 사망)가 기획한 제2차 세계평화순례에 처음 참가하면서 서방과 소련(당시) 등을 다니며 핵폐기를 호소했다. 미국에서는 원폭 투하를 결단한 트루먼 전 대통령과도 면담했다. 귀국 후에는 고등학생 등을 대상으로 원폭의식조사를 실시하고 온 힘을 다해 피폭교사 모임을 설립, 2012년까지 오랫동안 WFC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예가로서 1981년에 히로시마를 방문한 교황의 평화를 어필하는 비문을 썼다. ‘전쟁은 인간의 짓입니다’로 시작되는 비문을 새긴 비석은 지금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흔들리는 세계에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983년에 시집 ‘히로시마의 얼굴’을 출판. 1990년에 30년간 근무한 현립 하츠카이치고등학교를 퇴직한 후, 시마네대학, 히로시마분쿄여자대학(현 히로시마분쿄대학)에서 서예를 가르쳤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날부터 인생의
모든 것이 미쳐버리다

 

 

▲쇼와 11년(1936년) 11월 3일,
하쿠시마에 살았 때의 가족 사진.
6살 무렵의 모리시타씨 (사진 중앙)

1945년 8월 6일 제일중학교 3학년, 14살이었던 모리시타씨는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의사한테 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일단 출석해서 다음날부터 쉬겠다는 말을 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마지못해 나가게 되었다. 폭심지에서 약 1.5킬로 떨어진 쓰루미바시 옆에서 건물소개 작업하던 중에 갑자기 섬광이 번쩍이었고 “너무나도 뜨거워서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진 것 같았다”.

얼굴과 목에 큰 화상을 입었고 주변 친구들도 얼굴이 벗겨져 있었다. 도망치면서 유령처럼 손을 내민 군인들의 대열과 검게 탄 유아의 사체를 보았다. 집이 있는 니시하쿠시마쵸는 육군시설이 모여있는 모토마치 근처라서 폭심지에서 너무 가까웠다.
그날 아침, 현관 앞에서 배웅해 준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워온 산산조각난 어머니의 뼈 조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상처의 고통에 지쳐버린 나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서)

▲ ‘쇼와 6년 (1931년) 5월 3일’
이라고 기록된 사진. 생후 6개월 무렵

▼‘쇼와 18년(1943년) 2월’ 이라고 기록된 13살,
히로시마제일중학교 1학년

<아버지가 주워온 산산조각난 어머니의 뼈 조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상처의 고통에 지쳐버린 나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서)

어머니를 잃고
켈로이드가 남았다

―마음과 몸에 남겨진 상처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은 사춘기가 될수록 커져만 갔다. 현관 앞에서 상냥하게 배웅해 주던 어머니가 며칠 후에 백골로 변해 버렸다. 14살의 소년에게는 잔혹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나타나실 것 같아서요. 나를 지켜봐 주는 존재, 상냥함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졌습니다” 원폭으로 히로시마 거리는 붕괴되었다.

“형태가 있는 것은 무너지고 파괴되어 버리는 것인가” 라는 허무감을 지우기라도 하듯 모리시타씨는 ‘영원한 것’ ‘소멸하지 않는 것’ 에 대한 로망을 추구해 간다.
한편으로는 얼굴과 목에 남아 있는 켈로이드는 ‘눈에 보이는 트라우마’가 되어 모리시타씨를 계속 괴롭혔다. 주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거울을 보는 것이 싫었다. 도저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돔 그것은 나의 켈로이드 벗어날 수 없는 족쇄 파괴하고 싶지만 파괴되지 않는 세계가 무너질테니까>. 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는 원폭 돔을 자신의 켈로이드에 비유하여 고뇌를 토로한 시가 실려 있다.

▲피폭 후의 모리시타씨

▲1946년 히로시마 육군병원 에바분원 터에서. 원폭투하 후 처음으로 학우들과 만났다. “이미 죽은 친구도 있고 나처럼 가족을 잃은 사람, 화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군국교육의 가치관도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재회를 순순히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으악!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모리시타씨가 피폭체험을 그린 그림. 자신이 본 참상, 체험에 더해 친구들한테 들은 체험도 같이 그렸다. 섬광, 열선. 순식간에 우리 70명의 학생들은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졌다. 그리고 열풍이…(쓰루미바시 서쪽 끝, 폭심지에서 1.5km)라는 문장이 같이 쓰여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소장·제공)

▲모리시타씨가 피폭체험을 그린 그림. 자신이 본 참상, 체험에 더해 친구들한테 들은 체험도 같이 그렸다. 섬광, 열선. 순식간에 우리 70명의 학생들은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졌다. 그리고 열풍이…(쓰루미바시 서쪽 끝, 폭심지에서 1.5km)라는 문장이 같이 쓰여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소장·제공)

 

 

아버지는 자주 ‘대머리 그대로의 깨달음’이라는 말을
얘기해 주셨어요.

젊었을 때부터 대머리였던 어느 스님이 있었어.
그 외모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켈로이드로 고민하는
나를 위로해 주셨던거에요.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지…
그리고 나는 문학, 시, 단가로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대머리 그대로의 깨달음’이라는 말을
얘기해 주셨어요.

젊었을 때부터
대머리였던 어느 스님이 있었어.
그 외모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켈로이드로 고민하는
나를 위로해 주셨던거에요.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지…
그리고 나는 문학, 시, 단가로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으로 구원을 찾아서

일상을 깊이 통찰하고
감성을 갈고닦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현재의 히로시마대학 교육학부) 재학중인 모리시타씨

▲히로시마 옛 육군 군복공장은 1946년부터
몇 년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캠퍼스로 사용되었다. 당시 육군 군복공장의 희귀한 사진

켈로이드 때문에 고민하는 아들의 고뇌를 알고 있던 아버지는 바꿀 수 없는 외모에 괴로워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 좋겠다고 계속 격려해 주었다. 이러한 격려가 이후의 인생에 “내면적으로 깊게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라며 모리시타씨는 아버지에게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히로시마대학 문학부에 재학하면서 시와 소설 쓰기에 몰두하게 되지만 결핵에 걸려 요양을 계속하면서 졸업까지 6년이 걸렸다.

“병상에서 심심할 텐데 단가를 지어보면 어떻겠냐”는 친구의 권유로 모임에 들어가 단가 창작에 열중했다. 그 모임은 인생에서‘아름다움’을 찾는 탐미파. 체온계로 체온을 재고 수은의 눈금이 올라가면 열이 있다 =‘나쁨’이겠지만 그 움직임 자체를‘아름답다’고 본다. 일상을 관찰함으로써 감성이 갈고 닦여졌다. 잡지에 투고하거나 비평회에 참가하면서 병상의 소일거리였던 단가를 짓는 일은 어느 사이에 모리시타씨 삶의 보람이 되었고, 그 후 시를 짓거나 서예라는 창작 활동에 힘이 되었다.

교직에 종사하려고 했던 무렵 히로시마 피폭자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 가와모토 이치로씨(사진 안쪽 중앙), 요시카와 이쿠미씨(사진 앞줄 중앙)와 만나 영향을 받게 된다. 사진 오른쪽이 모리시타씨

▲교직에 종사하려고 했던 무렵 히로시마 피폭자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 가와모토 이치로씨(사진 안쪽 중앙), 요시카와 이쿠미씨(사진 앞줄 중앙)와 만나 영향을 받게 된다. 사진 오른쪽이 모리시타씨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서다

피폭한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의 사진.
결핵 치료로 교단에 서는 것은 1주일에 며칠뿐이었다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의 사진.
결핵 치료로 교단에 서는 것은 1주일에 며칠뿐이었다

전쟁 후 10년이 지난 1956년에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원자력평화이용박람회가 열렸다. 모리시타씨는 여학교의 인솔 교사로 방문하게 되었다. “질병을 추적한다(방사성 동위원소), 비행기와 배의 큰 에너지가 된다. 원자력은 훌륭하다고 하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료관에 피폭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켈로이드 표본과 열선으로 녹아버린 유물 등의 전시물을 보고 “무섭다 무서워” “오늘 밤은 잠을 잘 수가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여학생들이 속삭였다. 교사가 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들 교단에 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켈로이드도. 추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닐까?”
피폭 얘기를 피하게 되면서 교단을 떠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교원이 되었을 때의 모리시타씨. 히로시마대학 재학중에 결핵을 앓고 기흉 치료를 하는 등 장기 요양을 피할 수 없었던 경험에서 병상을 벗어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교원이 되었을 때의 모리시타씨. 히로시마대학 재학중에 결핵을 앓고 기흉 치료를 하는 등 장기 요양을 피할 수 없었던 경험에서 병상을 벗어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지친 밤 끝자락에
강은 더러워지고 거리는 겁에 질려
돔 위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명하여
제물의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나무 끝자락처럼
붙여진 생명

그래서
지도도 없이
떠난 영혼은
상냥하게 치장한
히로시마와 재회해도
수줍게 망설인다

 

‘녹색의 돔’ 일부 발췌
모리시타 히로무의 시집 ‘히로시마의 얼굴’에서

 

 

딸의 탄생

모든 아이들을 위해 말해야지

▲히로시마 현립하츠카이치고등학교에서 서예 교사 시절.
피폭 교사로서 평화교육도 시작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벌거벗는 것을 좋아하지만
옷을 벗게 해서는 안돼
시커멓게 탄 아기가 되살아난다”
모리시타씨의 서예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전쟁은 한국전쟁(1950년)으로 배신당했다. 또 자신을 괴롭혔던 원폭이 사용되는 것인가? 켈로이드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전운동가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켈로이드를‘내세우는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생각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현립고등학교에서 서예 교사가 되고 나서도 일상을 힘껏 열심히 사느라 굳이 과거를 되돌아 보지 않았지만, 30살 넘어 결혼해 아이가 생긴 것이 전환기가 되었다. 필사적으로 아내의 젖가슴에 매달리는 딸의 모습에 힘찬 생명력과 행복을 느끼는 동시에 피폭 후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유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들한테 다시는 그런 봉변을 당하게 해서는 안돼” 피폭 체험을 말하는 것에서 도망치던 자신이 눈도 뜨지 않은 큰딸에게 등 떠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증언 활동을 시작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아내 히사코씨하고 세 아이들
가족은 항상 모리시타씨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차녀, 장남과 함께

◀〈사진 왼쪽〉
아내 히사코씨하고 세 아이들
가족은 항상 모리시타씨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사진 오른쪽〉
차녀, 장남과 함께

평화활동의 서막

바바라 레이놀즈씨와의 만남

▲바바라씨(사진 중앙)와 오구라 가오루씨(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사무국장,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관장을 역임한 히로시마시 직원. 1979년 사망)와 함께 찍은 모리시타씨(사진 오른쪽)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평화순례 출발 전에 한 컷
사진 오른쪽이 아내 히사코씨
사진 중앙은 아버지와 장녀
왼쪽은 히사코씨의 어머니

바바라 레이놀즈씨(1915-1990)는 ABCC(원폭상해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는 남편 일로 1951년 일본에 건너온 주부였지만, 히로시마에서 피폭자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분주하게 평화 활동을 하게 된다. 1965년 평화 단체‘월드프렌드쉽센터’(WFC)를 히로시마 시내에 설립하고 1969년 귀국 후에도 미국에서 반전, 반핵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만나보면 상냥한 아줌마예요. 하지만 사재를 털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감명을 받게 돼요” 라는 모리시타씨. WFC의 이사장을 2012년까지 오랫동안 역임한 것도 바바라씨에 대한 경애하는 마음과 피폭자 치료에 힘쓴 초대 이사장이며 외과의사인 하라다 도민씨(1912-1999) 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시타씨가 피폭 체험을 말하기로 결심한 1960년대는 쿠바 위기(1962년)와 중국의 핵실험(1964년) 등 핵무기를 둘러싼 움직임이 긴박했다. 그러던 중, 바바라 레이놀즈씨가 기획한 세계평화순례를 알고 처음으로 참가하여 75일간 피폭자들 십여 명과 통역가와 함께 미국, 프랑스, 소련(당시)등 8개국을 돌면서 핵무기 폐기를 호소했다.

어머니를 빼앗고 피폭자로 모리시타씨를 괴롭혔던 미국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한 저항감은 없었다. 또 미국의 NGO 관계자인 선의의 사람들이 순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미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호기심도 뒷받침했다.

 

 

 

 

‘Forgive me, Forgive me !’
(용서해 줘, 용서해 줘)

평화순례로 방문한 미국에서,
평화회의가 끝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였어요.

나이든 미국인 남성이 다가와서,
큰 몸을 흔들며 펑펑 우는 거예요.

피폭 증언을 듣고,
참기 힘든 기분이었겠지요.

미국에도 있거든요.
원폭의 끔찍함에 눈물 흘리며 반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Forgive me, Forgive me !’
(용서해 줘, 용서해 줘)

평화순례로 방문한 미국에서,
평화회의가 끝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였어요.

나이든 미국인 남성이 다가와서,
큰 몸을 흔들며 펑펑 우는 거예요.

피폭 증언을 듣고,
참기 힘든 기분이었겠지요.

미국에도 있거든요.
원폭의 끔찍함에 눈물 흘리며
반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피폭자로서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단상에서 인터뷰를 받는 형식을 취했다. 일본에서 건너간 모리시타씨를 포함한 피폭자 일행은 그 밑에서 숨을 죽이고 줄곧 지켜보았다
(트루만 도서관에서)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잡고 소감을 적은 귀중한 메모.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면담을 마친 후의 모리시타씨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잡고 소감을 적은 귀중한 메모.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1964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바바라씨의 노력으로 전쟁 중에 ‘귀축미영(마귀와 짐승같은 미국영국)’ 의 상징이었던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이 실현되었다. 트루먼씨와 방문 단장, 통역 3명이 무대에서 대면하고, 모리시타씨와 그 일행은 객석에서 지켜 보았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한다”
전쟁으로도 원폭투하로도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발언이었다. 많은 미군의 목숨을 구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했다고 암암리에 말하고 싶었나? 하고 나중에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자신이 만든 국제연합을 통해 국제적인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며 불과 3분간의 면담은 끝났다.

트루먼 본인이 피폭자 앞에 나온 것만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피폭자 입장에서 보면 허탕이었다. 모리시타씨도 실망감을 당시의 메모에 적고 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어요. 원폭 투하를 결정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머리를 스쳐지 않은 걸까요?”

90살을 넘어서

생명이 있는 한 계속해서 공유하다

미국의 퇴역재향군인회 자리에서 “우리 주장이 옳다”며 트루먼과 같은 대응을 했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원폭 투하가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폭자의 목소리가 피폭지뿐만 아니라 세계에 닿아 공감해 주는 외국인이 있다는 데 큰 의의를 느꼈다.

오랜 피폭 증언활동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찬물을 끼얹은 형태가 되었지만, 모리시타씨는 온라인으로도 증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90살이 넘어 잘 들리지 않고 걷기도 힘들고 체력이 저하되는 것은 감출 수 없다. 그래도 증언하려는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해 여름 잔혹한 빛과 열로 절명한 아이들, 평화활동에 반생을 바친 바바라씨, 원폭을 모르는 지금의 아이들…. 자택에 보관되어 있는 메모와 기록, 스크랩 등 수만 점의 자료는 그날부터 평화를 염원해 온 히바쿠샤(피폭자) 모리시타 히로무의 결정체이다.

▲서예가로서의 모리시타씨의 대표작 중의 하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전시된 비석에 쓰여 있는 비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1년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평화를 호소하여 “피폭자로서 반핵, 반전 활동하는데 뒷배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문의 휘호를 부탁받고 몇 번이나 고쳐 쓰며 정성껏 마무리했다.

▲자택에는 히로시마, 평화, 원폭, 서예와 시, 문학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이 보관되어 있다

▼자택 2층 서재에서. 여기에서 온라인으로 증언 활동도 하고 있다.

 

 

 

 

“나 또한 피폭자입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히로시마시 나카구) 옆에 묵묵히 세워져 있는 바바라씨 기념비에 생전의 말을 휘호한 것도 모리시타씨이다. 서예가로서의 아호는 모리시타 세이즈루.
지금도 틈틈이 붓을 잡고 있다.

 

 

 

“나 또한 피폭자입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히로시마시 나카구) 옆에 묵묵히 세워져 있는 바바라씨 기념비에 생전의 말을 휘호한 것도 모리시타씨이다. 서예가로서의 아호는 모리시타 세이즈루.
지금도 틈틈이 붓을 잡고 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야마모토 요시노부・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다나카 도시코

 

히로시마, 얼굴

다나카 도시코

 

 

집 천장이 뜯기고
지붕이 무너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어요.

“아아, 예쁘네” 하고.

원폭도
방사능도
버섯 구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 나이의 나는

화상을 입어 아파서 울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푸른 하늘을 본 거예요.

집 천장이 뜯기고
지붕이 무너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어요.

“아아, 예쁘네” 하고.

원폭도
방사능도
버섯 구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섯 살 나이의 나는

화상을 입어 아파서 울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푸른 하늘을 본 거예요.

 

  • Profile
    Toshiko Tanaka

다나카 도시코
(결혼 전 이름: 하라 가츠코)

1938년(쇼와13년) 10월18일, 히로시마시 가코마치(현재의 나카구 나카지마쵸, 폭심지에서 약 1km)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어머니, 2살, 6살 어린 여동생 둘과 전후에 태어난 남동생 하나로 모두 여섯 가족이었다. 군용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집에서 숙박객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으며 활발하게 자란다.

1945년 3월에 무토쿠 유치원을 졸업하고 혼자서 친척집으로 피난하여 다카타군에 있는 요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부모님은 어린 딸이 걱정되어 5월에 집으로 데리고 와 나카지마 초등학교로 전학시킨다.

그러나 그 여름에 가족들은 퇴거를 종용받는다. 우시타 미나미구(지금의 히가시구 우시타와세다, 폭심지에서 약 2.3km )에 있는 친척집으로 세 들어 이사하여 우시타 초등학교로 전학한 것이 원폭투하 1주일 전이었다.

1945년 8월6일, 6살 난 도시코씨는 등교 전에 친구하고 만나기로 한 벚나무 아래에서 피폭하여 화상을 입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고열에 의식을 잃었다. 12살 때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이라고 진단받았다.

구내염이 연이어 생기고 목이 부어 음식을 겨우 삼킬 수 있었다. 매일 죽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극심한 권태감에 고통스러웠다.

노보리쵸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학생회장에 입후보하라고 강력하게 권유해도, 생활에 쫓겨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매일 옷을 수선하여 돈을 버는 어머니 일을 도와야 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손님에게 옷을 배달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표현활동에 대한 동경심에 학교신문 동아리의 회장이 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그림이나 디자인의 세계로 진학하리라 결심하고, 4년동안 일하면서 고쿠타이지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모아 1958년에 도쿄의 분카복장학원에 진학하여 디자이너를 목표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후 히로시마에 돌아와 1964년 25살의 나이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시어머니의 권유로 가츠코에서 도시코로 이름을 바꾸고 칠보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연하게 시작한 칠보였지만 금속칠보 작가인 사이토 케이이치씨 밑에서 6년 동안 공부하며 칠보의 재미에 눈을 뜬 도시코씨의 작품은 일본 미술전과 일본 현대미술공예전에서 인정을 받아 단골작가가 된다. 도쿄예술대학과 뉴욕아트스쿨에서 단기유학도 하면서 늘 향상심을 가지고 활동한다.

1981년 히로시마 시장은 히로시마를 방문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도시코씨의 작품을 증정한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피스 보트에 4번 승선하여 세계를 여행하면서 피폭체험을 증언한다.

2016년에는 자택을‘평화교류 스페이스’로 개방하고, 현재 칠보작가로서 ‘우주를 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제로 프리랜서 작품활동을 한다. 피폭자로서는 핵무기폐기국제캠페인(ICAN), 히바쿠샤 스토리즈, 일본 원자수소폭탄피해자 단체협의회(니혼 히단쿄) 활동에도 공헌. 피폭증언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년 시절

아버지(맨 왼쪽)가 출정하기 전에 찍은 기념사진. 가운데가 어머니,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가 도시코씨. 하라 집안의 장녀로서 사랑받았다.

생후 9개월된 도시코씨

2살 때의 도시코씨

도시코씨의 본가는 히로시마시 가코마치초(현재의 나카구 나카지마초)에서 군인을 위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소집된 군인이 우지나 항구에서 출정하기 전날 밤에 머무는 숙소였다. “군인들은 모두 고향에 가족을 두고 왔겠죠. 그래서 어린 내가 자기 아이나 친척 아이하고 겹쳤을 거에요. 아주 귀여워해 주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근처에 있던 무도 훈련장에서 밤 늦게까지 연습하는 모습을 보다가 혼나기도 하고 강가에서 바지락을 캐며 놀기도 했다. 전쟁 중의 힘든 생활 속에서도 조그만 일상이 있었다. 1945년 여름, 도시코의 집 주변이 건물소개로 철거하게 되어 퇴거를 종용받았다. 가족이 우시다 미나미구(현재의 히가시구 우시타와세다)로 이사한 것은 원폭투하 1주일 전이었다. 만약 그대로 폭심지에서 약 1km 떨어진 가코마치에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삶과 죽음은 우연으로 갈린다.

 

피폭하고 살아남은
6살 때의 여름

1945월 8일 아침, 당시 6살이었던 도시코씨는 벚나무 아래에서 함께 등교할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적기다!”하고 소리쳐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섬광으로 눈 앞이 새하얘졌다. 8시15분 원자폭탄이 투하된 순간,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오른팔, 머리, 왼쪽 목 뒤쪽으로 화상을 입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간신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은 바짝 불에 타고 얼굴과 팔이 새까매지고 옷은 너덜너덜해졌다. 너무 변한 도시코씨의 모습에 어머니는 자기 아이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고통과 공포에 눈물을 흘리면서 문득 구멍이 뚫린 집 지붕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이 보였다.“아, 예쁘다. 그 순간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내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때의 푸른 하늘이 아직도 도시코씨의 뇌리에 박혀있다. 화상으로 생긴 물집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날 밤 도시코씨는 고열로 의식을 잃었다. 며칠 후에 정신이 들고 보니 온 동네가 시체를 화장하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1945년 3월 유치원 졸업 때의 기념사진.
도시코씨는 현재 평화기념자료관이 있는 무토쿠 유치원에 다녔다.
이 사진을 찍고 5개월 후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도시코씨는 함께 찍은 친구 대부분이 폭사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 아파한다.

8살 무렵의 도시코씨. 원자폭탄의 방사능은 도시코씨의 작은 몸을 위협했다. 12살 때 백혈구의 수치이상으로 진단되어 매일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화상도 안 입은 친구가 죽어가는 거예요. 당시에 피폭 영향을 받는 곳은 폭심지에서 2km 이내라고 하며, 내가 있었던 우시타 지구는 약 2.3km 떨어졌다고 300m의 차이로‘원폭 탓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내가 ‘칠보’를 시작하다니

인생이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눈 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의 꿈, 목표, 사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비록 형태가 바뀌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내가 ‘칠보’를 시작하다니

인생이 생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요.

중요한 것은
눈 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자기의 꿈, 목표, 사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비록 형태가 바뀌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동경으로 상경하여
디자인의 최첨단을 접하게 된 젊은시절

중학교 3학년 때의 도시코씨

매년 학년 말에 수료식이 있었다.
당시에 고시노 준코, 다카다 겐조, 미야케 잇세이도 재학했다고 한다.

도시코(왼쪽)씨는 분카복장학원 재학중에 1년동안 휴학하고 대만 제약회사의 캠페인걸이 되어 4개월간 대만 각지를 다닌다. 그 후 홍콩, 베트남, 태국, 싱가폴을 다니면서 일반시민이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시절에 호기심과 적극적인 성격으로 아시아를 혼자 여행하는 경험을 했다.

전쟁 후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야간고등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낮에 일하며 저축한 돈으로 동경에 있는 분카복장학원에 진학하여 디자인을 공부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저명한 디자이너로부터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건의를 받았지만, 저축한 돈이 바닥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히로시마에서 맞선 얘기가 나와 1964년 25살에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전업주부로 육아에 쫓기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칠보교실을 권유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칠보작가인 사이토 게이이치씨를 만나면서 칠보의 가능성을 알게 된다. 그 후 도시코씨는 작품제작에 몰두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펼쳤다. 전통공예를 중시했던 스승으로부터 건방지다는 말도 들었지만 연달아 수상을 하면서 활약의 장을 넓혀간다. 수십년이 지난 어느 날 커다란 소포가 배달된다. “사이토선생님의 소중한 도구와 편지가 들어있었어요.‘도시코가 제일 훌륭했어요’라고… 인정해 주셨던 거죠.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어요.”

귀향해서 시작한
칠보의 세계에 빠져들다.

칠보작가로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978년부터 일본현대공예전에서 연속으로 입선하고, 1979년에는 일본미술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입선하면서 합계 16회 입선이라는 빛나는 공적을 쌓은 도시코씨. 1981년에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한 고(故)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히로시마시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을 증정한다. 또한 같은 해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협회의 스에이시 가즈씨로부터 어떤 요청을 받았다. “재미피폭자가 피폭자수첩을 취득하려면 히로시마 의사단을 미국으로 불러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해요. 어떻게 안 될까요?”하고.
당시에 히로시마시 국제교류과장의 협력으로 로스앤젤레스의 미일문화회관에서 미일친선칠보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도시코씨는 칠보작가를 대표해서 전국의 작가한테 작품을 모으고 자신 또한 출품해서 전시판매를 성사시켰다. 약 2주간의 전시기간으로 얻은 수익금 전액은 미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협회에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도시코씨의 예술활동은 아주 자연스럽게 평화활동으로 이어졌다.

도시코씨의 은사이며 칠보작가인 사이토 게이이치씨(오른쪽에서 두 번째)

1981년 미국에서 개최된 미일친선칠보전에서. 오른쪽에서 3번째가 도시코씨.
‘맨발의 겐’ 영문판 200권과 원폭 관련 서적 400권을 가지고 가서 기증했다. 미국 피폭자협회의 회원이 각 도서관에 기부해 주셨다”

미국의 칠보전문지 ‘Glass on Metal’ 1994년4월호에는 다나카 도시코 특집이 실렸다.

■칠보란?
금속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을 구워서 붙여 장식하는 기법 및 그 공예품. 일반적으로는 액세사리 제작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도시코씨는 칠보에 스텐레스를 조합한 대형 벽면작품을 고안하여 참신한 작품을 연달아 세계에 소개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세계가 이어져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마치 작은 배
우리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승무원입니다.

어느 장소에서의 다툼은 분명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보유해서도 안됩니다..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지구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피폭자로서의 진심 어린 소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세계가 이어져 있음을 체감했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마치 작은 배
우리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승무원입니다.

어느 장소에서의 다툼은
분명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보유해서도 안됩니다.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지구상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피폭자로서의 진심 어린 소원입니다.

 

 

피스보트로 세계로 나아가
70살에 시작한 피폭증언

 

피스보트에 승선하고 베네수엘라에서의 만남을 통해 피폭증언 활동을 시작한 도시코씨.
한번 열린 마음의 문에서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생각과 말이 계속 넘쳐나왔다.

도시코씨는 2005년에 옆에서 항상 지켜주었던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2007년 어느 날, 한 신문 광고에서 피스보트를 알게 되었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기도 해서 바로 응모하기로 한다.항해 도중에 과달카날과 라바울에도 정박했다. 그곳은 도시코씨의 친정 부모가 운영했던 여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군인들이 떠난 곳이었다. 자신을 귀여워해주었던 군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던 중에 동승자와 함께 위령제를 지냈다.
대부분의 다른 피폭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 당시에는 피폭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도시코씨. 그러나 전환기가 찾아온다. 2008년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였다. 베네수엘라의 한 시장님이 “피폭자들은 원자폭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말할 의무가 있다” 고 건넨 이 말이 도시코씨를 변화시켰다. 남미의 TV방송국 테레슬이라는 위성방송을 통해 도시코씨는 베네수엘라 땅에서 70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피폭 증언을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피폭증언활동을 개시하여 현재까지80여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학생, 과학자, 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피폭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평화는 단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2010년 5월,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재검토 회의에 맞춰 수백명의 피폭자가 미국으로 날아갔다. 일부는 남아서 25개 지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증언활동을 했다. 마침 NPO히바쿠샤 스토리즈의 일원으로 초대되어 뉴욕에 머무르고 있었던 도시코씨는 별도로 외국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퀸즈 지구의 공립고등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 중에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소년이 있었다. 이스라엘군에게 친척이 살해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도시코씨는 “증오를 증오로 돌려주는 복수의 끈을 끊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용서할 필요가 있다” 고 말했다. 도시코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힘을 기르고, 학교 선생님이 놀랄 정도로 내면적으로도 변화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적‘기적은 날개를 타고’ (미나모토 가즈코 집필/고단샤 출판)에도 소개되었다.

“원폭으로 피폭당하고 화상을 입고 학급 친구들을 잃었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미국을 용서할 수 있는 겁니까?”하고 물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소년. 도시코씨와의 만남이 그의 내면을 크게 흔들었다.

처음 만나고 나서 몇 년 후, 성장한 소년과 그의 은사.
이 책에 도시코씨와의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자택 아뜰리에를 개방하고
전 세계 사람을 수용하다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의 손자와 그 가족과 함께

에놀라 게이 의 승무원인 제이콥 베서의 손자 아리 베서씨와 함께

피폭증언을 시작하고 나서 칠보 제작에도 변화가 생겼다.“화조풍월,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작품 어딘가에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표현하는 사인과 같은 것을 넣고 있다”고 하는 도시코씨. 자택 1층을 ‘평화 교류 스페이스’로 개방하고 벽면은 자신의 칠보작품으로 장식했다.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에는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손자인 클리프턴 트루먼 대니얼씨와 그의 가족이 방문했다. “다니엘씨의 부인과 함께 작은 액세서리를 만들었는데 아주 기뻐했어요. 이게 평화가 아니겠어요?” 하고 눈을 반짝였다. 증오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중학생에게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도시코씨. 그 바탕에는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다. “해외에서 친구를 사귀세요. 친구가 생기면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폭탄을 떨어뜨려버려라’ 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확장되는 평화의 고리
미국의 일본 가레산스이정원
모래판에 물결무늬를 디자인

마틴 맥켈러씨(플로리다대학의 한미술관, 가레산스이 정원관리자)가 츄코쿠신문사의 가나자키 유미씨와 상담하고 나서 도시코씨와의 콜라보레이션 안이 부상되었다. 2020년 9월21일 국제평화데이에 맞춰 미국 국내 5곳의 가레산스이정원에서 도시코씨가 디자인한 도안을 바탕으로 모래판에 물결 무늬를 작업했다. 그 모양은 영상작품으로도 제작되었다. 2021년부터는 매년 북미일본정원협회의 공식행사가 되었고 개최지도14곳으로 늘었다. 텍사스주의 포트워스식물원과 원폭을 개발한‘맨해튼 프로젝트’의 거점이었던 테네시주 오크리지의 정원을 포함한 9개 주에 있는 정원과, 전쟁 중에 일본인강제수용소가 있었던 캘리포니아주의 만자나 국가지정 사적지 등 가레산스이가 없는 2곳도 참가하여 평화를 희망하는 조용한 표현활동이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획에 대한 아이디어는 플로리다대학의 한미술관(Harn Museum of Art)의 마틴 맥켈러씨로, 1998년에 교토를 방문했을 때 수행여행 온 학생에게 평화에 관한 설문지를 받은 것을 계기로 “평화를 위해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하고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시코씨가 직접 그린 디자인화. 실제 정원의 면적을 축소하여 계산한 다음 평화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본어 문자 へ(he), い(i), わ(wa) 를 주제로 디자인해서 그렸다.

 

 

 

 

여섯 살이었던 그날

원폭이 가져온 압도적인 파괴 속에서
울타리 틈으로 살짝 보인 푸른 하늘이

지금도 나를 격려하고
이끌어 줍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고인이 된 동급생들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다하고 싶습니다.

핵무기는 이 지구에 필요없어! 라고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여섯 살이었던 그날

원폭이 가져온 압도적인 파괴 속에서
울타리 틈으로 살짝 보인 푸른 하늘이

지금도 나를 격려하고
이끌어 줍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고인이 된 동급생들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다하고 싶습니다.

핵무기는 이 지구에 필요없어! 라고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평화교류의 장소로써 개방하고 있는 자택 1층 ‘평화 교류 스페이스’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에서는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우주적 시야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를 방문하고 인종을 뛰어 넘는 교류를 거듭한 경험이 작품에 투영되어 깊이를 더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평화교류의 장소로써 개방하고 있는 자택 1층 ‘평화 교류 스페이스’에서.
도시코씨의 작품에서는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한 우주적 시야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를 방문하고 인종을 뛰어 넘는 교류를 거듭한 경험이 작품에 투영되어 깊이를 더하고 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요시모토 아야・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가마다 나나오

 

히로시마, 얼굴

가마다 나나오

 

 

진찰실과 요양시설에서
지금까지 많은 피폭자 분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선생님’이라고 합니다만,
그분들이야말로 나의‘선생님’입니다.

 

 

진찰실과 요양시설에서
지금까지 많은 피폭자 분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선생님’이라고 합니다만,
그분들이야말로 나의‘선생님’입니다.

 

  • Story.1
    Nanao Kamada

가마다 나나오

1937년(쇼와12년) 3월 20일, 만주 봉천(지금의 중국 선양)에 사는 가마다 집안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 회사를 경영하고 가족 일가는 일본인 마을에서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나나오씨를 안고 달래 주었다는 가마다 집안의 장남 마사미는 만주 의과대학(현재 중국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졸업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남을 잃은 부모님의 슬픔은 깊었고 나나오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의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1945년 당시 여덟 살이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15일에 종전을 맞이했고 일본은 전쟁에 패했다. 그리고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본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셋째 형인 사부로씨가 마을 주변에 2km의 전기 울타리를 세울 정도로 생활환경은 엄중한 경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1946년 5월 6일에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긴 선박 여행을 거쳐 센자키(현재의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 도착하여 1946년 7월 17일에 가마다 가문의 발원지인 가고시마에 다다른다. 나나오씨는 익숙하지 않은 가고시마 사투리에 당황했지만 서서히 적응하였고 타고난 활발한 성격으로 초·중학교에서 스포츠와 공부에 열중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어머니와 함께 돈을 벌러 나갔던 셋째 형인 사부로씨가 있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로 이사하여 현립 다가와 히가시고교(현 후쿠오카 현립 도요고등학교) 에 진학했다. 의학의 길을 걷고자 수험잡지인‘게이세쓰 지다이’를 읽고 히로시마대학을 목표로 정했지만 수험 경쟁률이 7.2배나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형의 도움을 받는 가정형편으로는“재수를 할 선택지가 없다”. 너무 높은 경쟁률에 불안감이 스쳐 아버지를 대신했던 형에게 중얼거리자“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격려해 주었다. 형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수험에 합격했다. 여기서부터 나나오씨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만주에서 규슈로, 시대의 파도를 넘어

아버지 마사요시씨는 1890년에 사쓰마반도 이자쿠 마을(현재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서 태어났다. 차남으로 태어나 농지를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흐름에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장남인 마사오씨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의학의 길을 목표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1939년에 병사. 그 길을 나나오씨가 이어받았다.

 

아버지를 여윈 후 부모님을 대신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셋째 형 사부로씨와 부친의 부재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키워주신 어머니 소메씨.
어머니가 1952년 2번째 뇌졸중 후 찍은 사진

아버지를 여윈 후 부모님을 대신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셋째 형 사부로씨와 부친의 부재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키워주신 어머니 소메씨.
어머니가 1952년 2번째 뇌졸중 후 찍은 사진

만주에서의 안정된 생활은 일본이 패전한 후 완전히 달라졌다. 믿었던 지인들의 배신, 일본인 마을을 서성거렸던 러시아군과 팔로군 ,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유골과 몸뚱이 하나만으로 일본으로 돌아온 가족… 그곳에는 비참함, 억울함, 슬픔, 불안감 등 여러 기분이 뒤섞여 있었다. 훗날 의사로서 많은 피폭자와 만나고 때로는 임종을 지켜보게 된 나나오씨.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는 인간으로서의 밑바탕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길러졌는지도 모릅니다”.

응원과 기대에 힘입어 의학의 길로

의사가 된 나나오씨는 1998년 신기하게도 가마다 집안의 장남인 마사미씨의 모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형제들도 모두 도항하여 그리운 땅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무츠오, 나나오, 사부로, 이츠오).

 

가마다 형제 간에 근황을 공유한
가마다 집안의 뉴스레터‘츠도이’

 

어렸을 때 고생을 함께 하면서 항상 나나오씨를 도와주었던 형들은 성인되어서는 각자 다른 현에서 생활한다. 떨어져 살아도 서로 근황을 알리고자 글쓰기를 좋아하는 형들이 형제 뉴스레터를 기획하여 1961년부터 2005년까지 44년 동안 문면으로 계속 교류했다. “나는 연구로 바빠서 좀처럼 근황을 전하지 못해 형님들한테 자주 재촉받았지요 (웃음). 그래도 형님들이 착실하게 보내줘서 지금은 당시를 생각하는 좋은 기록이 되어 우리들의 재산이 되었어요”. 문장과 자료를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소중히 여긴 나나오 의사의 꼼꼼함은 형제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 Story.2
    Nanao Kamada

높은 경쟁률을 뚫고 1955년 히로시마대학교의 의과대학에 훌륭하게 합격.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과 어머니, 형제들의 기대에 부응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피폭하고 10년이 지나고나서 히로시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히로시마 시내는 텅 빈 넓은 대로(현재 헤이와오도리)가 동서로 뻗어 있었고 강을 따라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열차를 탔더니 한 여름인데 긴 소매를 입고 있는 사람, 모자를 눈 깊숙이 내려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아, 피폭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피폭의 그림자가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세 형님들이 보내주는 학비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장학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의학 전문서를 구입하는 지출은 아끼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동시에 요트부에 들어가 연습에도 열중했다. 1960년 23살이 되었을 때, 제1회 미야지마 일주 요트 레이스에서 2인승 스나이프급으로 무려 우승. 이 요트부에서의 인맥이 나중에 나나오씨의 장래를 크게 바꾸게 된다.

대학 졸업 후, 1961년 후쿠오카현에 있는 규슈 고세이넨킨병원(현 JCHO 규슈병원)에서 1년간 인턴으로 근무했다. 처음에는 외과를 지망했다. “외과가 내 성격에 맞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당시에는 수술용 장갑이 없어서 수술을 할 때마다 손을 수세미로 문질러서 씻는데 그러다 보니 손에 염증이 생기는 거야. 피부염이었던 거지”. 이렇게는 외과를 지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요트부 시절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기로 와라”선배가 소속된 곳은 같은 해, 히로시마대학에 설치된 지 얼마 안된 원폭 방사능 의학 연구소(원의연)였다. 다음 해 4월1일에는 대학병원에 피폭내과가 신설된다고 했다. 전국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아직 드문 부문이었기에 미지의 분야에서 일할 것을 생각하니 나나오씨의 마음이 움직였다.

1962년 25살이 되었을 때, 히로시마대학 의학연구∙임상 제1연구부문 피폭내과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부문 초대교수인 도모나가 마사노부씨와 만나게 된다. 도모나가 교수는 나가사키 의과대학 출신으로 혈액내과학 전문가로 유명한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후배이면서 주치의이기도 한 의사였다. 원폭 피폭자의 백혈병과 일반 백혈병과는 다른 건가? 원폭 피폭자의 백혈병이 발병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기 위해 도모나가 교수는 나나오씨에게 염색체 연구를 지시했다.

오전에는 히로시마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피폭내과에서 외래를 담당하고 오후에는 입원병동 환자를 진료했다. 염색체 연구는 밤 늦게까지 매진했다. 연구동료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원폭 피폭자 혈액 속에서 만성골수성 백혈병에서 발견되는 필라델피아 염색체를 발견했다. 1962년 11월에는“만성골수성 백혈병 조기증상 사례”논문을 발표했다. 원폭이 투하되고 17년이 지나 나나오씨의 “피폭자와 함께 걷는 삶”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6일 8시15분

폭심지에서 500m 이내에 있던 한 초등학교에서
우연히 지하실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8살 소년

원폭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한 후 고아수용소로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 결혼하고 마침내 행복을 잡았지만
위암을 앓고 두 번의 수술 경험
첫 손주를 백혈병으로 잃고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여
오랫동안 자기 아이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원폭 방사선과 관련된 간질성 폐렴을 앓고,
호흡을 할 때마다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염색체 이상률은 21%

피폭된 지 60여년이 지난 어느 해가 끝날 무렵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핵무기는,
피폭된 인간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평생 학대를 합니다.

 

 

 

위의 글은 나나오 의사가 오랫동안 교류했던 근거리 피폭자 중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이다.
즉사할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지만 그 몸과 마음, 생활 실태는 크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피폭 후 70년간 추적조사를 하는 동안에 66명이 죽었다. “사망한 분의 약 50%가 암에 걸렸습니다. 원폭 투하 시에 쬔 방사선으로 한 순간에 각 장기의 줄기세포 DNA가 손상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암세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마다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기를 달리해 암이 발병하는데 전이가 아니라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암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간을 유전자 레벨로 손상시키고 평생동안 그 인생을 손상시킨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1945년 8월 6일 8시15분

폭심지에서 500m 이내에 있던 한 초등학교에서
우연히 지하실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8살 소년

원폭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한 후 고아수용소로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 결혼하고 마침내 행복을 잡았지만
위암을 앓고 두 번의 수술 경험
첫 손주를 백혈병으로 잃고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여
오랫동안 자기 아이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원폭 방사선과 관련된 간질성 폐렴을 앓고,
호흡을 할 때마다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염색체 이상률은 21%

피폭된 지 60여년이 지난 어느 해가 끝날 무렵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핵무기는,
피폭된 인간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평생 학대를 합니다.

 

위의 글은 나나오 의사가 오랫동안 교류했던 근거리 피폭자 중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이다.
즉사할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지만 그 몸과 마음, 생활 실태는 크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피폭 후 70년간 추적조사를 하는 동안에 66명이 죽었다. “사망한 분의 약 50%가 암에 걸렸습니다. 원폭 투하 시에 쬔 방사선으로 한 순간에 각 장기의 줄기세포 DNA가 손상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암세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마다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기를 달리해 암이 발병하는데 전이가 아니라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암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간을 유전자 레벨로 손상시키고 평생동안 그 인생을 손상시킨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피폭자와 함께 걸어온 연구자의 삶

1967년(29세)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사진1)
1970년(33세)영어논문“골수성 세포 염색체에 미치는 방사선의 영향”을 나가사키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취득
1972년(35세)폭심지에서 반경 500m이내의 피폭생존자에 대한 조사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프로젝트”를 담당하다

(사진1)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 임상병리학 부서에서 연구자으로서 배움을 깊이했다

1978년(41세)영어논문을 국제혈액학회 등에서 발표, 세계적인 교과서 ‘Wintrobe 임상혈액학’에 게재되다
1982년(45세)‘원폭후장애연구회’에서 거듭된 보고로 히로시마현 의사회로부터 ‘히로시마 의학상’을 받다. 프로젝트팀 11명 대표로 수상
1985년(48세)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혈액학 연구부문 교수로 취임(사진2)
1988년(51세)IPPNW(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의)일본지부 이사로 취임
1991년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발족
1997~99년
(60세~62세)
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회장
2000년(63세)이바라기현 도카이촌을 방문해 임계피폭 사고조사와 지원을 하다(사진3)
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퇴직
1967년(29세)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사진1)
1970년(33세)영어논문“골수성 세포 염색체에 미치는 방사선의 영향”을 나가사키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취득
1972년(35세)폭심지에서 반경 500m이내의 피폭생존자에 대한 조사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프로젝트”를 담당하다

 

1978년(41세)영어논문을 국제혈액학회 등에서 발표, 세계적인 교과서 ‘Wintrobe 임상혈액학’에 게재되다
1982년(45세)‘원폭후장애연구회’에서 거듭된 보고로 히로시마현 의사회로부터 ‘히로시마 의학상’을 받다. 프로젝트팀 11명 대표로 수상
1985년(48세)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혈액학 연구부문 교수로 취임(사진2)
1988년(51세)IPPNW(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의)일본지부 이사로 취임
1991년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발족
1997~99년
(60세~62세)
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회장
2000년(63세)이바라기현 도카이촌을 방문해 임계피폭 사고조사와 지원을 하다(사진3)
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퇴직

(사진1)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 임상병리학 부서에서 연구자으로서 배움을 깊이했다

(사진2) 교수취임을 축하하며. 앞줄 가운데가 본인

(사진2) 교수취임을 축하하며. 앞줄 가운데가 본인

(사진3)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의료팀 일원으로서 이바라기현 도카이촌 핵연료가공회사 JCO에서 임계피폭 사고 조사와 지원

생애의 테마 “폭심지에서 반경500m 근거리 피폭자의 의학적 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와 히로시마시, NHK와의 공동연구로 발견된 폭심지에서 반경 500m 이내에 있던 피폭생존자 78명. 그 의학적 추적조사를 맡게 된 나나오 의사는 정기적인 건강검진, 염색체 이상률에서 나오는 피폭선량 측정, 혈청∙세포 레벨에서 방사선에 기인하는 이상성, 유전자 이상 등을 검출했다. 피폭자 분들과의 대화를 중시하고 무심코 내뱉는 말과 호소 속에서도 힌트를 찾았다. “두통이 있다는 분이 몇 사람 있어서 마음에 걸려 CT 촬영한 결과, 수막종이 발견되었어요. 이것은 꽤 드문 질병이에요. 검사를 거듭한 결과, 폭심지에서 1km이내에 있던 피폭자에게 수막종이 높은 비율로 발병하는 것이 판명된 거에요”

2017년에는 강연회도 열었다

  

근거리 피폭자 추적조사에서 얻은 지견

  • 가족붕괴∙가족형성장애(미혼,이혼,외톨이 노인) (1975)
  • 염색체 이상(악성화 소지)(1975)
  • 건강한 피폭자에 나타나는 암 유전자의 변화 (1990)
  • 두번째, 세번째의 암 발병 (2004)
  • 정신적인 면에서 해마다 불안 증강 (2006)
  • 원폭은 ‘평생 학대’상황을 만들어낸다 (2018)

※( )안은 발표 연도

  

“연구에 의해서 의학계 일반에 공헌하는 새로운 근거를 다수 밝혀냈다. 모든 것은 피폭자가 몸소 나타내고 이끌어 준 것입니다”골수천자, 피부생검, 거듭되는 혈액 채취…아픈 경험을 하게 되는 검사에 오랜 세월 동안 협력해 주신 피폭자분들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의에서 나나오 의사는 히로시마 대학을 퇴직하고 나서도, 자비와 휴일을 충당해 정기적인 건강 진단과 대화를 거듭했다. 전화와 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출장지에서는 선물을 보낸다. 잠시도 그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말을 걸 때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먼저 이야기를 듣는다.‘의사로서’이전에, ‘사람으로서’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나나오 의사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말을 걸 때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먼저 이야기를 듣는다.‘의사로서’이전에, ‘사람으로서’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나나오 의사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때까지의 나는,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서 피폭된 사람,
고선량을 쬔 피폭자를 진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원폭 요양원에서 만난
다양한 피폭 체험을 거친 입소자 여러분들이
제가 보고 있던 세상을
크게 펼쳐줬어요.

 

 

 

 

그때까지의 나는,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서 피폭된 사람,
고선량을 쬔 피폭자를 진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원폭 요양원에서 만난
다양한 피폭 체험을 거친 입소자 여러분들이
제가 보고 있던 세상을
크게 펼쳐줬어요.

 

 

  • Story.3
    Nanao Kamada

2000년 의사이며 연구자로서 지내온 히로시마대학에서의 38년간을 마치고, 일반 병원에서의 직을 거쳐 2001년부터 공익 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으로 변신. 보수는 크게 줄었지만 나나오 의사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피폭자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피폭자의 시선, 공정 원칙, 성실한 대응’이라고 스스로 행동훈령을 정하고 현장에 나가길 원했다. 입소자와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요양원 내부의 작은 변화나 문제점을 알기 위해 주춤하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이사장실을 나와 시설 내부를 돌아다녔다. 입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1년에 25번의 행사를 기획. 입소자의 고령화에 따라 침대에서 지내는 사람도 증가했기 때문에 홀에서의 행사를 거실에서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의 배선 공사를 하고 모두가 같은 화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궁리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그 수는 194명. “피폭자 분들이 안심하고 마음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그 서포트 역할을 하는 직원을 당연히 소중히 여겨야 하죠”. 직원들의 능력과 의욕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연수를 하면서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히로시마현으로부터 위루·객담흡인 연수 교육시설로서 인정을 받아 많은 자격 취득자를 배출하였다. 또 이른 시기부터 병구완을 도입해 요양원 전체에서 고령화된 피폭자에게 존엄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간병·간호에 힘썼다. 망년회에서는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직원을 표창하고 나나오 의사가 직접 만든 기념사진이 담긴 앨범을 증정하고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유머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활동과 학술 발표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원폭투하 후 2주내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가 피폭되거나 내부피폭, 피폭 2세를 깊이 연구한 것도, 다양한 형태의 피폭을 경험한 노조미엔의 입소자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끼쳤다.

노조미엔에서 보낸 16년 동안 나나오 의사의 매일은 아침 5:30 기상, 8:30부터 20:30까지 근무, 23:30 취침. 원폭 양호홈이라고 하는 특별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또 연구자로서, 높은 이상을 내걸고 온 힘을 다했다.“대학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못지않은 알찬 시간이었죠”
그 에너지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 Story.3
    Nanao Kamada

2000년 의사이며 연구자로서 지내온 히로시마대학에서의 38년간을 마치고, 일반 병원에서의 직을 거쳐 2001년부터 공익 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으로 변신. 보수는 크게 줄었지만 나나오 의사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피폭자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피폭자의 시선, 공정 원칙, 성실한 대응’이라고 스스로 행동훈령을 정하고 현장에 나가길 원했다. 입소자와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요양원 내부의 작은 변화나 문제점을 알기 위해 주춤하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이사장실을 나와 시설 내부를 돌아다녔다. 입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1년에 25번의 행사를 기획. 입소자의 고령화에 따라 침대에서 지내는 사람도 증가했기 때문에 홀에서의 행사를 거실에서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의 배선 공사를 하고 모두가 같은 화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궁리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그 수는 194명. “피폭자 분들이 안심하고 마음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그 서포트 역할을 하는 직원을 당연히 소중히 여겨야 하죠”. 직원들의 능력과 의욕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연수를 하면서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히로시마현으로부터 위루·객담흡인 연수 교육시설로서 인정을 받아 많은 자격 취득자를 배출하였다. 또 이른 시기부터 병구완을 도입해 요양원 전체에서 고령화된 피폭자에게 존엄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간병·간호에 힘썼다. 망년회에서는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직원을 표창하고 나나오 의사가 직접 만든 기념사진이 담긴 앨범을 증정하고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유머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활동과 학술 발표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원폭투하 후 2주내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가 피폭되거나 내부피폭, 피폭 2세를 깊이 연구한 것도, 다양한 형태의 피폭을 경험한 노조미엔의 입소자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끼쳤다.

노조미엔에서 보낸 16년 동안 나나오 의사의 매일은 아침 5:30 기상, 8:30부터 20:30까지 근무, 23:30 취침. 원폭 양호홈이라고 하는 특별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또 연구자로서, 높은 이상을 내걸고 온 힘을 다했다.“대학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못지않은 알찬 시간이었죠”
그 에너지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히로시마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히로시마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2001년(64세)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 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 취임 (사진1)
2002년(65세)나가이 다카시 평화기념·나가사키상 수상 (사진2)
2005년(68세)‘히로시마의 할머니’출판 (사진3)
2006년(69세)원폭 후 장애연구회에서 ‘ 입시 피폭자 백혈병’에 대해 발표
2007년(70세)PTSD 심포지엄(이탈리아)에 참가·보고
2008년(71세)IPPNW(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의) 세계대회(인도)에서 발표
2011년동일본 대지진이 발생
후쿠시마현에 가서 피폭 조사를 하다(사진4)
2012년(75세)‘후쿠시마 내부피폭선량’에 대해 발표
IPPNW 세계대회(일본)에 참가·발표
2015년(78세)세계핵피해자포럼(히로시마)을 운영, 동 보고서 감수(사진5)
2016년(79세)‘폐암 조직에서 증명된 내부피폭’에 대해 발표
2017년(80세)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퇴직
히로시마대학 객원교수 취임
의료법인 닌코회 혼고추오병원 검진센터장 취임
2018년(81세)서일본 호우재해를 계기로 상기 병원에서 퇴직
히로시마 원폭장애대책 협의회(건강 관리·증진 센터)
비상근 근무

 

(写真1)

▲(사진1)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은 그 특성상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다. 평화 학습으로
방문하는 초·중학생, 수련의와 간병 실습생, 황족과 당시의 총리 등.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도 많은 직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입소자의 행복과 직원들의 보람을 중시하는 운영에 고심했다

 

▼(사진2) 나가이 다카시박사는 은사인 도모나가 교수가 주치의로서 마지막까지 꼭 붙어서 돌본 환자였다. 감회가 깊은 수상

(写真2)

▶(사진3) 노조미엔에서 직원 연수를 위해 준비한 텍스트를 책으로 재편집해서 평화교육 교재로 자비 출판. 그 매상은 모두 사업단에 기부할 것을 공약하고 실행. 그 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을 작성하여 IPPNW 보스턴 본부의 웹 사이트에서 전문을 열람하고 다운로드 가능하게 하여 히로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사진3) 노조미엔에서 직원 연수를 위해 준비한 텍스트를 책으로 재편집해서 평화교육 교재로 자비 출판. 그 매상은 모두 사업단에 기부할 것을 공약하고 실행. 그 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을 작성하여 IPPNW 보스턴 본부의 웹 사이트에서 전문을 열람하고 다운로드 가능하게 하여 히로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写真3)

 

▼(사진4) 2011년 5월, 원의연 출신으로 후쿠시마시에 거주하고 있는 의사, 사이토 오사무 의사와 함께 독자적으로 조사.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와 가와마타쵸 주민으로부터 채뇨와 함께 2개월간의 행동을 청취하고 쪼인 방사선량을 개인별로 추정해 발표(2012년).

(写真4)
(写真5)

(사진5) 세계 핵피해자 포럼(2015년 히로시마) 운영

학술발표 ※( ) 안은 발표연도

직접피해자 연구
  • 백혈병 소지가 되는 피폭자 골수세포에 염색체 이상이 오래 지속되는 것(1969)
  • 염색체 이상으로 피폭된 선량을 추정할 수 있을 것
  • 건강한 고선량 피폭자에게 타인의 염색체 이상을 유발하는 인자(혈청인자)가 있는 것(1978)
  • 반치사선량(사람 반쯤이 30일 이내에 사망하는 방사선량)은 3.5-4Sv인 것(1989)
  • 건강한 피폭자 골수세포 DNA에 암 유전자(RAS) 변이가 있는 것(1988)
  • 사춘기에 피폭된 사람의 유방암 다발(1989), 뇌종양 다발(1997)을 새로운 사실로 보고
병행해서 혈액전문분야에서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전과정 규명(1978), 8;21전좌형 백혈병 존재 최초 발표(1968, 1976), 4개의 백혈병 전좌형 유전자 배열 규명 등
입시피폭자 연구1970-1990년 사이에 입시 피폭자로부터 발생한 백혈병 환자 113명을 해석. 8월 6일과 7일에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간 피폭자에게 백혈병 발병률이 전국의 발병률과 비교하여 3.4배 높다는 사실을 발표(2006)
피폭2세 연구원의연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피폭 2세를 해석. 119,311명을 동정. 현내 피폭 2세 수는 13만~13만5천명으로 추정(2010), 그 중에 94명의 백혈병 발병자를 확인하고 부모 양쪽이 피폭된 경우는 한쪽만 피폭된 경우보다 발병 빈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표(2012)하고 부모가 피폭하고나서 약 10년 이내에 태어난 2세에게 발병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보고(2014)
내부피폭 연구폭심지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서 직접 방사선을 쬐지 않았더라도‘검은 비’가 내린 지역에서 오염된 빗물과 야채를 먹은 사람에게 피폭 50년 후부터 폐암, 위암, 대장암, 혈액병을 앓은 사례를 보고(2008) 그 사람의 폐암조직에서 우라늄 붕괴로 보이는 방사선 비적을 유제감광법으로 증명(2016)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리는,
세상에 두 곳밖에 없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지요.

핵무기의 비인도적 파괴를 체험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리는,
세상에 두 곳밖에 없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지요.

핵무기의 비인도적 파괴를 체험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곤도 고코

 

히로시마, 얼굴

곤도 고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폭심지에서 1.1km
원자폭탄이 작렬하고
폭삭 무너져버린 히로시마 나가레카와 교회 근처 목사관.

생후 8개월이었던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을 면한 나의 투쟁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거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폭심지에서 1.1km
원자폭탄이 작렬하고
폭삭 무너져버린 히로시마 나가레카와 교회 근처 목사관.

생후 8개월이었던 나는
어머니 품에 안겨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죽음을 면한 나의 투쟁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거다.

 

  • Profile
    Koko Kondo

곤도 고코
(결혼 전 이름:다니모토 고코)

1944년(쇼와 19년) 11월 20일, 히로시마 나가레카와교회 목사였던 다니모토 기요시씨와 치사씨의 장녀로 히로시마시 노보리쵸에서 태어난다. 1945년 8월 6일, 생후 8개월 때 폭심지로부터 1.1km 떨어진 교회 목사관에서 피폭하고 무너진 건물 아래에 깔렸지만 어머니가 두 팔로 감싸 안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후, 아버지는 상처 입은 피폭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어린 고코씨는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거의 집에 없는 아버지에게 고독감을 많이 느꼈다. 동시에 갈 곳도 없이 상처입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교회를 방문하는 원폭 고아와 원폭으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원폭 처녀’라고 불린 여성들과 교류했다. 그들의 고뇌를 보면서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한편, 아버지를 통해 피폭지인 히로시마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는 미국인의 존재감도 느끼며 자랐다. 원폭 투하 후, 저널리스트인 존 허시씨(1914-1993)는 히로시마를 방문해서 다니모토 목사를 포함한 6명의 피폭자를 취재하고 나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히로시마’를 출판해 미국에‘다니모토 기요시’라는 이름을 알렸다. 다니모토 목사의 평화활동을 처음부터 지원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씨(1892-1973). 그들을 통해 다니모토 목사와 알게 된 히로시마 피스센터협력회의 일원인 노먼 커즌즈씨(1915-1990). 평화활동가 플로이드 슈모씨(1895-2001). 어린 고코씨는 그들에게“Koko”라고 불리며 귀여움 받았다.

중학생 때, 정기건강검진을 위해 방문한 ABCC(원폭 상해조사위원회, 현 방사선영향연구소)에서 가운을 벗고 벌거벗은 상반신을 몇몇 어른들 앞에서 노출해야 하는 견디기 어려운 굴욕을 경험하고, 피폭자’가 아닌 삶을 찾아 혼자 도쿄의 오비린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5년 반 동안 미국에 체류하던 중에 펄 벅씨와 친교를 쌓고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66년에 센테너리 여자 전문대를 졸업하고, 1969년에 아메리칸대학을 졸업했다. 같은 해 귀국 후에는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잠시 비서로 일했다.

30살에 훗날 목사가 되는 곤도 야스오씨와 결혼했다.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가 나가레카와 교회에서 운영하는‘히로시마 피스센터’ 일을 돕기 위해 부부가 함께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이사했다. 그 후, 히로시마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통역을 하거나 국내외에서의 피폭 체험을 증언하는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1996년부터는 매년 리쓰메이칸대학과 모교인 아메리칸대학의 미국과 일본 대학생들을 데리고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평화식전에 참석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을 안고 국내에서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을 해외의 양부모와 연결해 주는‘국제양자결연’에 반세기 동안 힘을 쏟는가 하면 세계 어린이와 함께 평화를 호소하는 미국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도 맡게 된다.

 

유년시절―피폭자 구제에 분주한 다니모토 목사의 딸로서

 

유년시절

―피폭자 구제에 분주한
다니모토 목사의 딸로서

▲원폭 투하 후의 나가레카와 교회.
고코씨는 히로시마 거리 전체가 괴멸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원폭 투하 후의 나가레카와 교회.
고코씨는 히로시마 거리 전체가 괴멸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9년 10월 1일 미나미마치 평화주택 완성 기념사진.
플로이드 슈모씨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손으로 건설되었다.
중앙에 있는 슈모씨에게 안겨있는 고코씨▼


플로이드 슈모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와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은 모금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피폭자를 위한 주택과 집회소 건설을 추진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949~1953년에 21호를 건설하고, ‘히로시마의 집’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플로이드 슈모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와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은 모금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피폭자를 위한 주택과 집회소 건설을 추진했다. 히로시마에서는 1949~1953년에 21호를 건설하고, ‘히로시마의 집’이라고 불리며 사랑받았다.

▲1949년 10월 1일 미나미마치 평화주택 완성 기념사진.
플로이드 슈모씨를 중심으로 동료들의 손으로 건설되었다.
중앙에 있는 슈모씨에게 안겨있는 고코씨

원폭투하 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원 물자를 정리하는 다니모토 목사와 동료들. 어린 고코씨의 모습도 있다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깊이 교류했던
노먼 커즌스 씨에게 안긴 히로코씨▼

▲원폭투하 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원 물자를 정리하는 다니모토 목사와 동료들. 어린 고코씨의 모습도 있다

 


노먼 커즌스

미국작가, 편집자, 언론인.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의 일원으로서 미국인의 양부모가 원폭고아에 대한 정신적 서포트를 위해 ‘정신적 입양 결연’ 과 ‘원폭 처녀’의 도미 치료 등의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64년 히로시마시 특별명예시민.


노먼 커즌스

미국작가, 편집자, 언론인.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의 일원으로서 미국인의 양부모가 원폭고아에 대한 정신적 서포트를 위해 ‘정신적 입양 결연’ 과 ‘원폭 처녀’의 도미 치료 등의 지원 활동에 힘썼다. 1964년 히로시마시 특별명예시민.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깊이 교류했던
노먼 커즌스 씨에게 안긴 히로코씨

▲가족끼리 찍은 기념사진.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씨, 어머니 치사씨, 동생들과 함께. 오른쪽 끝이 고코씨. 막내 남동생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전후 나가레카와 교회가 재건되면서 부지 안에 나가레카와 유치원도 병설되었다

1951년에 발족한‘원폭상해자 갱생회’에서는 피폭자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다니모토 목사의 호소로 기부받은 재봉틀은 원폭에 의한 화상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에게 양재로 자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고코씨의 앨범에서.
영어로 쓴‘KOKO’와 가슴에 십자가가 있는 인물화로 고코씨가 자란 환경을 엿볼 수 있다

 

▲1951년에 발족한‘원폭상해자 갱생회’에서는 피폭자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다니모토 목사의 호소로 기부받은 재봉틀은 원폭에 의한 화상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에게 양재로 자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히로시마 피스센터’ 와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


1946년‘더 뉴요커’에 발표된 존 허시의 르포‘히로시마’로 인해 다니모토 기요시씨의 존재는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다니모토씨는 2년 후인 1948년 9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15개월 동안 31주 256개 도시에서 강연하며, 히로시마의 참상과 평화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강연 중에 다니모토씨가 호소한 것은 피폭자 케어와 평화 발신의 거점‘히로시마 피스센터’의 필요성이었다. 이 호소에 소설가이며 사회 활동가였던 펄 벅씨가 동조해 주었고, 덕분에 알게 된 노먼 커즌스씨의 협력으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 피스센터’, 뉴욕에 ‘히로시마 피스센터 협력회’가 발족되었다. 협력회의 지원 하에 원폭 고아를 위한 ‘정신적 양자 입양운동’과‘원폭 처녀’가 도미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교량역할을 했다. 센터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다니모토 기요시 평화상 수여, 세계평화변론대회 개최를 통해 평화의 고귀함을 알리고 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워하고 있었다.

어리고 젊은 언니들의 부드러운 피부를
검붉게 태운 원자폭탄
그리고 그것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그 비행기
정확히 겨냥한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언젠가 내가 원수를 갚아 주마!”

그리고 10살의 나는 ‘그’를 만났다.

돌이킬 수 없는 죄에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에게

아아 신이시여!
그 순간 강하게 쥔 내 주먹이 풀려버린 겁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워하고 있었다.

어리고 젊은 언니들의 부드러운 피부를
검붉게 태운 원자폭탄
그리고 그것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그 비행기
정확히 겨냥한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언젠가 내가 원수를 갚아 주마!”

그리고 10살의 나는 ‘그’를 만났다.

돌이킬 수 없는 죄에
자책감에 사로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에게

아아 신이시여!
그 순간 강하게 쥔 내 주먹이 풀려버린 겁니다.

 

 

  • Story.1
    Koko Kondo

“고코, 고코”
고코씨는 어릴 때 교회로 오는 젊은 언니들에게 동생처럼 귀염받으며 자랐다. 당시 4살이었던 고코씨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다.
“눈 코 입술 턱 … 언니들 얼굴에 너무 심한 켈로이드가 있었어. 어린 나는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 어디를 봐야 좋을지 몰랐던 거야”
여성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점 그들의 몸을 망가뜨린 원폭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다.
“원폭을 떨어뜨린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내가 복수를 할 거야”

그로부터 6년 후인 1955년 5월. 10살이 된 고코씨는 뜻하지 않게 그 때를 맞이한다.
그것은 ‘원폭 처녀’의 켈로이드 치료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히로시마 피스 센터 협력회의 제안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TV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었다.

스크린이 활짝 열리며 스튜디오에 등장한 사람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백인 남성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어머니에게 물었다.
“고코, 저 사람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부조종사야”
이 사람이야말로 고코씨의 오랜 ‘숙적’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기 ‘에놀라 게이’의 전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였다.
이날 방송의 최대 볼거리로 피폭자 구제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와 원폭을 투하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인 캡틴 루이스와의 대면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줄곧 미워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다. 이 사람만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코씨는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고코씨의 귀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다.
“신이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My God, What have we done?). 나는 원폭을 투하하고 바로 이 말을 비행일지에 썼습니다”
목메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고코씨는 그 눈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적이었던 이 사람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크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내 안에도 악은 있다. 미워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나약함이다” 고코씨가 증오를 극복한 순간이었다.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 때 연설에서 “어떤 여성은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를 용서했다. 정말로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고코씨와 캡틴 루이스와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 Story.1
    Koko Kondo

“고코, 고코”
고코씨는 어릴 때 교회로 오는 젊은 언니들에게 동생처럼 귀염받으며 자랐다. 당시 4살이었던 고코씨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었다.
“눈 코 입술 턱 … 언니들 얼굴에 너무 심한 켈로이드가 있었어. 어린 나는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지. 어디를 봐야 좋을지 몰랐던 거야”
여성들과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점점 그들의 몸을 망가뜨린 원폭에 대한 증오가 깊어졌다.
“원폭을 떨어뜨린 조종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내가 복수를 할 거야”

그로부터 6년 후인 1955년 5월. 10살이 된 고코씨는 뜻하지 않게 그 때를 맞이한다.
그것은 ‘원폭 처녀’의 켈로이드 치료성금을 모금하기 위해 히로시마 피스 센터 협력회의 제안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TV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었다.

스크린이 활짝 열리며 스튜디오에 등장한 사람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백인 남성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어머니에게 물었다.
“고코, 저 사람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부조종사야”
이 사람이야말로 고코씨의 오랜 ‘숙적’이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군기 ‘에놀라 게이’의 전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였다.
이날 방송의 최대 볼거리로 피폭자 구제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아버지 다니모토 기요시와 원폭을 투하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인 캡틴 루이스와의 대면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줄곧 미워했던 인물이 눈앞에 있다. 이 사람만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코씨는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고코씨의 귀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의외의 말이었다.
“신이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My God, What have we done?). 나는 원폭을 투하하고 바로 이 말을 비행일지에 썼습니다”
목메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고코씨는 그 눈물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적이었던 이 사람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었구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크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내 안에도 악은 있다. 미워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나약함이다” 고코씨가 증오를 극복한 순간이었다.

 

2016년 5월 27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 때 연설에서 “어떤 여성은 원폭을 투하한 조종사를 용서했다. 정말로 미워해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고코씨와 캡틴 루이스와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무대 위에 단 한 사람
움츠러드는 나에게 라이트가 켜진다

저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운 벗어’

천 한 장으로 된 속옷차림
남의 눈이 들여다본다
굴욕, 분노, 억울함, 슬픔···

내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그때 결심했어
이제 그만! 히로시마를 벗어나자!
목숨이 있는 한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미국은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목적으로 1947년에 설립한 원폭 상해 조사위원회(ABCC, 현 방사선 영향 연구소)는 어른뿐만 아니라 젖먹이와 유아의 건강 상태도 추적 조사했다. 고코씨는 유소년기부터 1년에 1~2회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중학생 때 평소와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강당 같은 넓은 방에서 의사로부터 천 한 장의 속옷차림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강한 라이트를 받고 몇몇 어른들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몸을 살펴보니 고코씨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신이시여, 저를 지금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아! 히로시마를 떠나고 싶다···!”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고코씨는 이 굴욕적인 체험을 오랫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무대 위에 단 한 사람
움츠러드는 나에게 라이트가 켜진다

저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운 벗어’

천 한 장으로 된 속옷차림
남의 눈이 들여다본다
굴욕, 분노, 억울함, 슬픔···

내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그때 결심했어
이제 그만! 히로시마를 벗어나자!
목숨이 있는 한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미국은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목적으로 1947년에 설립한 원폭 상해 조사위원회(ABCC, 현 방사선 영향 연구소)는 어른뿐만 아니라 젖먹이와 유아의 건강 상태도 추적 조사했다. 고코씨는 유소년기부터 1년에 1~2회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중학생 때 평소와 같이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강당 같은 넓은 방에서 의사로부터 천 한 장의 속옷차림으로 검진을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강한 라이트를 받고 몇몇 어른들이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몸을 살펴보니 고코씨의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신이시여, 저를 지금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세요”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없었다. “아! 히로시마를 떠나고 싶다···!” 도쿄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고코씨는 이 굴욕적인 체험을 오랫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 Story.2
    Koko Kondo

도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고코 씨는 5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노벨상 작가인 펄 벅씨와 깊이 교류를 하게 된 것도 이 유학 기간중의 일이었다. 아버지 기요시씨가 설립한 ‘히로시마 피스센터’의 찬동자였던 펄 벅 씨는 자신도 전쟁고아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면서 6.25전쟁에서 미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사재를 털어가며 동분서주했다. “어떤 사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빛날 수 있는 기적이다” 펄 벅씨의 이러한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고코씨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친구들도 만나며 이국 땅에서 충실한 청춘시절을 보냈던 고코씨였지만, 졸업을 눈 앞에 둔 대학 4학년 때 다시 히로시마의 속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현지에서 만난 미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고코씨는 ABCC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때문에 “히로시마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안고 있어서 그와의 약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약혼자의 삼촌이고 의사가 둘 사이에 ‘NO’를 들이댄 것이다.
“히로시마 폭심지 옆에서 피폭한 처자는 정상적인 아이를 낳지 못할 거야”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끝까지 따라다니는 히로시마(ヒロシマ).
결국, 약혼은 파혼하고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고코씨였지만, 뇌리 한편으로는 그‘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었던 얼굴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던 언니들.
화상으로 달라붙은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몸이 되어 약혼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됐어”라고 했던 그 젊고 다정한 여성들.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든데 언니들은 더 힘들었겠다···”
그녀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다가가게 된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도 있고 해서 대학 졸업 후에 일본으로 귀국하고 잠시 도쿄에서 근무한 후, 아버지 기요시씨의 “히로시마에서 평화 활동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바람도 있어 30살에 결혼한 남편과 함께 1976년에 귀향하게 된다.
그 무렵에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대한 거부감은 희미해졌다.
“평화활동에만 분주할 뿐 딸자식인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서운함으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도망다니고 원폭과 마주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수 많은 만남과 확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고코씨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도망치지 않겠어. 이 땅에 태어난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고코 씨는 현재 결혼하고 나서 몇 년 후에 목사가 된 남편과 효고현 미키시의‘미키 시지미교회’에서 지내면서 국내외로 핵 폐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다.

  • Story.2
    Koko Kondo

도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간 고코 씨는 5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제2의 어머니’로 생각하는 노벨상 작가인 펄 벅씨와 깊이 교류를 하게 된 것도 이 유학 기간중의 일이었다. 아버지 기요시씨가 설립한 ‘히로시마 피스센터’의 찬동자였던 펄 벅 씨는 자신도 전쟁고아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면서 6.25전쟁에서 미군과 현지 여성 사이에서 혼혈아로 태어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사재를 털어가며 동분서주했다. “어떤 사정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빛날 수 있는 기적이다” 펄 벅씨의 이러한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고코씨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친구들도 만나며 이국 땅에서 충실한 청춘시절을 보냈던 고코씨였지만, 졸업을 눈 앞에 둔 대학 4학년 때 다시 히로시마의 속박에 사로잡히게 된다.
현지에서 만난 미국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 고코씨는 ABCC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때문에 “히로시마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계속 안고 있어서 그와의 약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약혼자의 삼촌이고 의사가 둘 사이에 ‘NO’를 들이댄 것이다.
“히로시마 폭심지 옆에서 피폭한 처자는 정상적인 아이를 낳지 못할 거야”

도망치고 도망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끝까지 따라다니는 히로시마(ヒロシマ).
결국, 약혼은 파혼하고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게 된 고코씨였지만, 뇌리 한편으로는 그‘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머리를 부드럽게 빗어주었던 얼굴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던 언니들.
화상으로 달라붙은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몸이 되어 약혼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됐어”라고 했던 그 젊고 다정한 여성들.
“나는 지금 이렇게 힘든데 언니들은 더 힘들었겠다···”
그녀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다가가게 된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일도 있고 해서 대학 졸업 후에 일본으로 귀국하고 잠시 도쿄에서 근무한 후, 아버지 기요시씨의 “히로시마에서 평화 활동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강력한 바람도 있어 30살에 결혼한 남편과 함께 1976년에 귀향하게 된다.
그 무렵에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대한 거부감은 희미해졌다.
“평화활동에만 분주할 뿐 딸자식인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하는 서운함으로 느꼈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도망다니고 원폭과 마주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수 많은 만남과 확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고코씨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젠 도망치지 않겠어. 이 땅에 태어난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고코 씨는 현재 결혼하고 나서 몇 년 후에 목사가 된 남편과 효고현 미키시의‘미키 시지미교회’에서 지내면서 국내외로 핵 폐기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다.

 

 

지울 수 없는,
내 안의 ‘히로시마(ヒロシマ)’를 안고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의 모습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This is your life’에 출연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의 모습

 

프로그램 출연 후,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친교가 깊었던 펄 벅씨의 저택에 머물렀을 때의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펄 벅씨, 오른쪽 끝이 고코씨▼


펄 벅

미국인 작가. 어린 시절부터 전반생을 중국에서 보내고 소설 ‘대지’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49년 고아들을 위한 시설 ‘웰컴 하우스’를 개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수많은 양자입양을 시작했다.


펄 벅

미국인 작가. 어린 시절부터 전반생을 중국에서 보내고 소설 ‘대지’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193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 1949년 고아들을 위한 시설 ‘웰컴 하우스’를 개설하고 이를 발판으로 수많은 양자입양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출연 후, 아버지 다니모토 목사와 친교가 깊었던 펄 벅씨의 저택에 머물렀을 때의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펄 벅씨, 오른쪽 끝이 고코씨

▲오비린 고등학교 시절. 오른쪽이 고코씨

노보리쵸 중학교 시절. 왼쪽이 고코씨

▲노보리쵸 중학교 시절. 왼쪽이 고코씨

▲미국,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 재학 중의 고코씨

◀미국,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 재학 중의 고코씨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도쿄의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눈을 돌리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딸들과 함께

▲남편과 딸들과 함께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 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으로 활동

◀재단법인‘칠드런 에즈 더 피스 메이커스’의 국제관계 상담역으로 활동

 

존 허시씨가 피폭 후의 히로시마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책‘Hiroshima’를 손에.
이 책에 아버지 다니모토목사와 고코씨도 등장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강연 의뢰를 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두 모교, 센테너리 여자전문대학과
아메리칸대학 학교정보지에 고코씨 특집과 히로시마(ヒロシマ) 특집이 실리다

▲2018년 사회에 혁신적 영향을 준 인물에게 수여되는
‘Tribeca Disruptive Innovation Award’를 수상

▲존 허시씨가 피폭 후의 히로시마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책‘Hiroshima’를 손에.
이 책에 아버지 다니모토목사와 고코씨도 등장한다.
지금도 각지에서 강연 의뢰를 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미국 미주리주의 웹스터 대학교에 초청되어 연설했다.

 

 

 

  • Story.3
    Koko Kondo

전쟁 중에 태어나 특별한 사정을 안게 된 아이들의 권리 옹호에 앞장 선 펄 벅씨와 불에 타 들판이 된 히로시마에서 ‘정신적 입양 결연’ 활동에 온 힘을 다한 아버지 기요시씨에게 이끌리듯이 고코씨는 50년 정도 전부터 미국의 대학에서 배운 유아교육과 아동 심리학, 법률 지식을 살려 ‘국제 입양 결연’(※1) 을 중개하는 사무적 역할을 하고 있다.

“고코, 장래에 네가 어른들의 희생된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줬으면 좋겠어”
한 사람이라도 더 어린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제2의 어머니.
고코씨는 펄 벅씨의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학대를 받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맡아 함께 식사를 하거나 때로는 같이 목욕을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차분히 마주하고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런 시간을 함께하고 생각에 생각을 한 거듭한 결과, 그 아이에게 가장 최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에는 입양을 원하는 해외의 양부모에게 아이들을 소개한다고 한다.
“입양보낸 아이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어. 모두 소중한 내 아이야”
몇 년이 지나도 보금자리를 떠난 아이들로부터 ‘안티 고코’로 생각되고 있는 고코씨의 뇌리에는 늘 어릴 적 가까이서 보았던 원폭 고아와 상처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있다.

“유아 때 피폭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의 은혜를 받고 여기까지 왔어. 이것은 그 보답. 도움을 청하는 이 아이들은 버섯 구름 아래에서 울부짖었던 내 모습이지”
고코씨 또한, 지금까지 두 여자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키웠다.
“딸들은 나의 자랑이야. 두 아이와의 만남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Koko is our child.”

이렇게 말하며 어린 나를 아껴주었던
많은 훌륭한 어른들

친족과 같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의 고귀함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지.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 메워주는 마음.
person to person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면
잘못이 되풀이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Koko is our child.”

이렇게 말하며 어린 나를 아껴주었던
많은 훌륭한 어른들

친족과 같이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
마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의 고귀함을
나는 그들에게서 배웠지.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 메워주는 마음.
person to person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면
잘못이 되풀이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이케다 에미・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니시오카 세이고

 

히로시마, 얼굴

니시오카 세이고

 

 

1945년 8월 6일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오전 8시 15분
한 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거리에 떨어졌다.

그날, 건물소개 하러 나간
내 동급생 192명은
모두 사망했다.

나카지마신마치, 폭심지에서 약 600미터.

뜨거운 열기에 그을리고 폭발에 날아가고,
얼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45년 8월 6일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오전 8시 15분
한 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거리에 떨어졌다.

그날, 건물소개 하러 나간
내 동급생 192명은
모두 사망했다.

나카지마신마치, 폭심지에서 약 600미터.

뜨거운 열기에 그을리고 폭발에 날아가고,
얼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Profile

니시오카 세이고

1931년(쇼와 6년) 10월 25일, 오사카시 미나토구에서 태어난 후, 히로시마시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한다.

부모님과 형이 둘인 다섯 식구로 3형제 중 막내. 전쟁 중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1945년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현재, 현립 히로시마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6일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카지마신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600m)의 건물소개 작업을 하루 쉬고, 센다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2km)에 있는 학교 내 작업에 나섰다. 그게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줄도 모르고. 교문을 들어섰을 때, B29의 폭음이 희미하게 들려서“경보가 해제되었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건물소개하러 나간 동급생은 전원 사망. 니시오카씨 자신도 얼굴과 몸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했다. 처음에는 고료중학교 수용소, 8월 9일에는 사카무라 수용소로 이동하고 8월 15일에 아버지의 고향인 이쿠치지마에 있는 친척집에 도착했다.“얼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나오고 구더기가 기어 나와 주변 사람이 나를 피했어요”가족과 친척들은 1학년 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니시오카씨를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척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서서히 회복하여 외갓집에 의탁해 생활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했다. 사회에 나가서는 설계 업무, 발전소 업무에 종사하며 35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는 가운데 결혼하여 두 자녀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자신의 피폭 체험을‘13살 소년의 원폭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종이연극을 제작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기증하고, 2019년 리뉴얼 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동관에 니시오카씨가 피폭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과 함께 전시되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다섯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원폭투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친구들과 히로시마 시민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의 전쟁과 피폭 체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활동을 착실하게 계속하고 있다.

Profile

니시오카 세이고

1931년(쇼와 6년) 10월 25일, 오사카시 미나토구에서 태어난 후, 히로시마시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한다.

부모님과 형이 둘인 다섯 식구로 3형제 중 막내. 전쟁 중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1945년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현재, 현립 히로시마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6일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카지마신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600m)의 건물소개 작업을 하루 쉬고, 센다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2km)에 있는 학교 내 작업에 나섰다. 그게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줄도 모르고. 교문을 들어섰을 때, B29의 폭음이 희미하게 들려서“경보가 해제되었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건물소개하러 나간 동급생은 전원 사망. 니시오카씨 자신도 얼굴과 몸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했다. 처음에는 고료중학교 수용소, 8월 9일에는 사카무라 수용소로 이동하고 8월 15일에 아버지의 고향인 이쿠치지마에 있는 친척집에 도착했다.“얼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나오고 구더기가 기어 나와 주변 사람이 나를 피했어요”가족과 친척들은 1학년 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니시오카씨를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척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서서히 회복하여 외갓집에 의탁해 생활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했다. 사회에 나가서는 설계 업무, 발전소 업무에 종사하며 35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는 가운데 결혼하여 두 자녀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자신의 피폭 체험을‘13살 소년의 원폭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종이연극을 제작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기증하고, 2019년 리뉴얼 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동관에 니시오카씨가 피폭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과 함께 전시되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다섯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원폭투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친구들과 히로시마 시민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의 전쟁과 피폭 체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활동을 착실하게 계속하고 있다.

한 장의 추억

전후, 히로시마역 앞 암시장에 생긴 아라카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당시에는 사진촬영이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작은 사진이라도 기뻤다”.
1946년 2월경 촬영

 

 

 

 

푸른 하늘에
한 가닥의 비행운…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B29가 생각나서
지금도 무서워요.

 

1945년 4월 8일, 니시오카씨는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에 입학했다. 긴장하면서도 희망에 찬 입학식을 마치고 신입생들만 수업을 받고 상급생들은 모두 학도동원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학년도 동원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고구마밭 개간, 방공호 토사운반, 건물소개 등 12살13살 어린이가 더위와 배고픔과 맞서 싸우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으며 중노동에 종사했던 것이다.

8월 6일. 니시오카씨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아 건물소개하러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교 교내 작업에 나섰다. 8시 15분. 건물소개 현장인 나카지마신마치는 폭심지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작업에 나섰던 동급생들은 단 한 발의 원폭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 되어 모두 숨졌다. 우연히 건물소개하러 나가지 않아서 목숨을 건진 니시오카씨의 가슴에는 항상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없이 비명횡사한 동급생들의 모습이 있다.

 

푸른 하늘에
한 가닥의 비행운…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B29가 생각나서
지금도 무서워요.

 

1945년 4월 8일, 니시오카씨는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에 입학했다. 긴장하면서도 희망에 찬 입학식을 마치고 신입생들만 수업을 받고 상급생들은 모두 학도동원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학년도 동원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고구마밭 개간, 방공호 토사운반, 건물소개 등 12살13살 어린이가 더위와 배고픔과 맞서 싸우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으며 중노동에 종사했던 것이다.

8월 6일. 니시오카씨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아 건물소개하러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교 교내 작업에 나섰다. 8시 15분. 건물소개 현장인 나카지마신마치는 폭심지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작업에 나섰던 동급생들은 단 한 발의 원폭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 되어 모두 숨졌다. 우연히 건물소개하러 나가지 않아서 목숨을 건진 니시오카씨의 가슴에는 항상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없이 비명횡사한 동급생들의 모습이 있다.

 

 

가장 친한 친구
이토 이즈오군을 생각하며

중학교 동급생인 이토 이즈오씨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몰자 추모평화기념관 제공

원폭이 투하되고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니시오카씨는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여 동급생들이 죽어간 건물소개 현장을 방문했다.
‘이토! 이토!’라고 친구 이름을 외쳐도 대답이 없었다. 하모니카를 잘 부르고 등대지기였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토 이즈오군. 입학하고 4개월 동안 매일같이 함께 놀았던 가장 친한 친구는 원자폭탄 한 발에 희생되어 가족과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손녀가 그린 원폭의 참상

‘항구의 배 사이로 떠다니는 시신’
2010년도 제작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소장)
피폭체험 증언자 / 가사오카 사다에씨
제작자 / 니시오카 유카씨 (63회생)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 고교의 창조표현 코스의 학생들은 피폭자 분들로부터 피폭 체험과 피폭 참상을 듣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 당시, 멤버 중에는 니시오카씨의 손녀도 있었다. 유카씨는 피폭자 분들의 아픈 과거에 대한 생각을 끌어내서 “이런 참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전쟁체험을
종이연극으로 남기다

기억하기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전쟁 그리고 피폭의 기억. 자신 안에 봉인해 둔 추억을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니시오카씨는 글로 기록했다. 종이연극‘13살 소년의 원폭체험’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철 게이비선 야가역 근처의 산에 파여 있던 방공호.

니시오카씨와 다른 중학생들은 2인 1조로 삼태기를 메고 토사를 운반했다

국철 게이비선 야가역 근처의 산에 파여 있던 방공호.
니시오카씨와 다른 중학생들은 2인 1조로 삼태기를 메고 토사를 운반했다

더위에 시큼해진 도시락도 쌀 한 톨 남김없이 먹고,

얼굴에 땀과 먼지로 검은 줄이 생길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열심히 건물소개 작업에 종사했다

더위에 시큼해진 도시락도 쌀 한 톨 남김없이 먹고,
얼굴에 땀과 먼지로 검은 줄이 생길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열심히 건물소개 작업에 종사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된
화필의 힘

1967년에서 69년 사이에 폴란드 장기 출장을 세 차례 경험한 니시오카씨. 잊을 수 없는 현지에서의 만남과 추억과 함께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을 때 본 그림이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어. 그림은 말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이것을 계기로 니시오카씨는 자신의 피폭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소박한 터치 속에 리얼리티가 담긴 작품은 당시에 대해 상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니시오카씨만이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이다.

 

 

 

 

지금까지 4번이나 구급차 신세를 지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의사가 말했다.
“피폭과의 관련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피폭자에게 이런 내장질환이 많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피폭자는 의료비가 공짜라서 곧바로 병원에 간다”고.

내 사촌은 건강관리수당 을 수급하고 있었지만
이웃한테‘세금 도둑’이라는 험담을 듣고 수급을 취소했다.

피폭자는 스스로 피폭한 것이 아니다.

 

원폭이 투하된 순간에는 니시오카 소년이 마침 교문을 들어서서 어진 에게 최고 경례를 했을 때였다.‘앗 뜨거! 뜨거!’ 라고 외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했다. 그 때 폭풍이 불며 날아가 버렸다. 눈과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려 있는데 물건이 펑펑 날아오고 기와가 비 오듯 떨어졌다. 다리가 대들보 같은 것에 끼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얼굴과 손이 순식간에 물집이 잡혔고 왼쪽 다리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학교는 폭심지에서 약 2킬로 떨어진 센다마치였다. 원폭은 니시오카씨의 몸 표면뿐만 아니라 몸속도 좀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4번이나 구급차 신세를 지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의사가 말했다.
“피폭과의 관련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피폭자에게 이런 내장질환이 많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피폭자는 의료비가 공짜라서
곧바로 병원에 간다”고.

내 사촌은 건강관리수당
수급하고 있었지만
이웃한테 ‘세금 도둑’이라는 험담을 듣고
수급을 취소했다.

피폭자는 스스로 피폭한 것이 아니다.

 

원폭이 투하된 순간에는 니시오카 소년이 마침 교문을 들어서서 어진 에게 최고 경례를 했을 때였다. ‘앗 뜨거! 뜨거!’ 라고 외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했다. 그 때 폭풍이 불며 날아가 버렸다. 눈과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려 있는데 물건이 펑펑 날아오고 기와가 비 오듯 떨어졌다. 다리가 대들보 같은 것에 끼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얼굴과 손이 순식간에 물집이 잡혔고 왼쪽 다리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학교는 폭심지에서 약 2킬로 떨어진 센다마치였다. 원폭은 니시오카씨의 몸 표면뿐만 아니라 몸속도 좀먹고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

그 근원은 같다.

히로시마를 경험하고 피폭된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그날까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발전소에 근무했던 니시오카씨는 히로시마 시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고 안심할 수도 있고 비용이 매우 싸다. 앞으로 일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니시오카씨는 그 강연을 떠올렸다. “그 무렵, 모든 사람이 원전은 훌륭하다고 믿고 있었다. 왜 핵의 무서움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제와서‘원자력 발전’과‘원폭’의 근원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

그 근원은 같다.

히로시마를 경험하고 피폭된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그날까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발전소에 근무했던 니시오카씨는 히로시마 시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고 안심할 수도 있고 비용이 매우 싸다. 앞으로 일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니시오카씨는 그 강연을 떠올렸다. “그 무렵, 모든 사람이 원전은 훌륭하다고 믿고 있었다. 왜 핵의 무서움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제와서‘원자력 발전’과‘원폭’의 근원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이종근

 

히로시마, 얼굴

이종근

 

 

나한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 라는 일본이름.
그리고
‘이종근 (李鍾根)’ 이라는 원래 이름.

일본인이 되고 싶어서 줄곧 일본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83살이 되어 피폭자로서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이종근’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이름으로는 피폭자로서의 이야기를 할 수 없거든요.
 

나한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 라는 일본이름.
그리고
‘이종근 (李鍾根)’ 이라는 원래 이름.

일본인이 되고 싶어서 줄곧 일본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83살이 되어 피폭자로서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이종근’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이름으로는 피폭자로서의 이야기를 할 수 없거든요.

 

  • Profile
    Lee Jong Keun

이종근 (李鍾根)

1928년 8월15일, 조선반도에서 시마네현으로 이주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히로시마현 요시와무라(현재의 하쓰카이치시 요시와)로 이사. 사카무라(현재의 아키군 사카쵸) 국민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철도국에 취직. 히로시마 제2기관구 소속이었던 16살 여름에 직장으로 가던 중 폭심지로부터 1.8킬로 떨어진 곳에서 피폭했다.

고물상을 운영하며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명(통명)으로 살았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세계 각지의 기항지와 선상에서 피폭을 증언하는 피스보트 선박여행에 참가한 2012년부터 원래 이름인 민족명(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히로시마시의 ‘피폭체험 증언자’ 로서 수학여행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체험을 증언하는 것 외에 피폭자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꾼을 육성하는 히로시마시 사업에도 협력해 피폭자를 대신해서 피폭의 실상을 전하는 ‘피폭 체험 전승자’ 육성에도 노력했다.

또한 한국 거주 피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현 지방본부가 설립한 ‘한국 원폭피해자 대책 특별위원회’ 의 위원장으로도 오랫동안 역임했다.

2022년 7월 30일 맹장암으로 자택에서 서거. 93세였다.

 

 

유년 시절

 

아버지 이학기(李鶴基)는 조선반도 경상남도에 있는 작은 농가 마을에 살았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농민들은 농작물을 공출해야 했다. 원래 부유한 농가였지만 마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수탈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해 어머니 정점봉과 누나를 남겨 두고 1920년에 혼자 일본에 건너왔다.

아버지는 시마네현 히키미초(현 마스다시)에서 숯불구이를 하며 살다가 1925년 어머니와 누나를 불러들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8년에 이종근씨가 태어났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히로시마현 요시와무라(현 하츠카이치시)로 이사했다.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차별을 받았다. 급우와 분쟁이 생기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벌을 서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냄새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가 씻어서 넣어준 김치가 담긴 도시락을 난로에 데웠다가 창문으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학교에서 하교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느 날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근처 잡화점을 지나가는데 주인 남자가 불러 세웠다. “야 조선인, 이리 와 봐!”. 시키는 대로 도로변에 서 있자 내 발에 오줌을 싼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하자 함께 화를 내야 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일본인이 하는 것에 대해 조선반도에서 온 인간은 거역할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머니・정점봉씨와 이학기씨

유년시절의 이학기씨(오른쪽)와 남동생

동경하던 철도원으로

철도원 시절의 이종근씨(오른쪽)

 

 

철도원이었을 때의 이종근씨

14살이었던 1943년 히로시마 철도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척들에게 이끌려서 히로시마역에서 본 멋진 증기기관차에 매료되어 기관차 운전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국가 기관이었기 때문에 시험은 어려웠지만 떳떳하게 합격했다. 일본인이 아니라서 채용 여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걱정되었지만 무사히 채용통지가 학교에 도착했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들었다. 교장선생님이 “이것을 가지고 내일 철도국으로 가라” 고 하며 봉투를 건네 주었다. 어떤 내용물인지 도저히 궁금해서 집에서 몰래 뜯어보았다. 그러자 비고란에 ‘조선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채용이 취소될까봐 그 부분을 지우개로 지웠다.

직장은 제2기관고로 히로시마역에서 조금 동쪽에 있었다. 기관고에 들어오는 기관차를 청소하거나 석탄을 보충하는 것이 임무. 일은 즐겁고 좋았지만 일을 시작할 무렵에 살았던 기숙사 생활은 힘들었다. 기숙사 내에서 폭력을 당하고 한창 먹을 나이에 음식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적었던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2년 정도 지난 후에 본가에서 통근하기로 했다. 그 무렵, 부모님은 사에키군 헤라손(현·하츠카이치시)에 살고 있었다. 하츠카이치시에서는 국철로 환승 없이 한 번에 히로시마역까지 갈 수 있었다. 그날 아침도 그 경로로 출근할 예정이었다.

 

 

 

그날

“다리 옆의 피폭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구라시게 유키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고등학교 68 회생 3 학년)
2015년도 제작 소장 :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1945년 8월 6일도 여느 때와 같은 출근길 아침이었다.

출근 전에 입고 갈 옷을 놓고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그 때문에 평소에 이용했던 7시 30분 하츠카이치시를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고 히로덴 전차로 출근하게 되었다. 8시 5분쯤에 폭심지가 된 오오테마치 부근을 통과하여 마토바쵸 전차 정류장에서 내려 고진바시를 막 건너던 그 때였다.

번쩍! 오렌지색 섬광이 눈앞을 지났다. 배운 대로 눈과 코와 귀를 막고 땅에 잠시 엎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전의 섬광이 거짓말처럼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민가와 건물들이 전부 없어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날아가버린 도시락을 주우려고 고진바시 밑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에 있던 어른들은 ‘신형 폭탄’ 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어른이 “너, 얼굴 새빨간데” 라고 해서 손으로 만져보니 아팠다. 내가 큰 화상을 입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새빨갛게 화상입은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들.

“도와주세요”

“물 좀 주세요”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못 본 체하면서 지나갔다.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데 무서워서 어느 한 사람한테도 손을 내밀어 도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뛰어서 도망갈 기력도 체력도 있었는데 왜 한 사람도 도와줄 수 없었을까?
여러분이라면 도와주겠죠. 그런데 나는 그때 할 수 없었어요.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걸어서 직장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기관차에 쓰는 기름을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그게 아프고 너무 아파서 집에서 쭉 누워있었다.

화상을 입은 데가 살이 썩어 구더기가 끓었다.
어머니는 ‘아이고’ 소리내며 울면서 젓가락으로 걷어주었다.

어느 날 동네 일본인 농가의 할머니가 기름을 가져다주었다. 그 기름을 바르고 순식간에 상처가 나았다. 감사의 말을 하고 싶어도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몰라 그 때 물어보았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목덜미의 구더기를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구보 유리노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고등학교 68 회생 3학년)
2015년도 제작 소장 :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
몸에 구더기가 생겼다는 부끄러움.

그래서 사람들 앞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내에게도 세 딸한테도 원폭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
몸에 구더기가 생겼다는 부끄러움.

그래서 사람들 앞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내에게도 세 딸한테도 원폭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 후의 생활

 

상처가 아물고 겨우 직장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음 해 2월이었다. 얼룩진 화상 자국때문에 동료들은 “가까이 오지 마라, 원폭병이 옮는다” 고 했다. 조선반도 출신의 인간으로서 계속 차별받다가 이번에는 피폭자라는 이유로 또 다른 차별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근무하다 18살이 되었을 때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습기간 동안 받은 일당은 1엔 25전, 그것이 월급제가 되면 월 57엔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직원이 되려면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했다. 이유를 대며 제출하지 않자 사무원으로부터 독촉을 받았다.

본국에 청구해서 서면이 올 때까지 2개월.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지만, 조선인이라는 것이 직장에 알려질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동급생의 권유로 운전면허를 취득해 현의 토목출장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단지 피폭자라는 것과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날 것 같아서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자동차 브로커 일을 시작했다. 이와쿠니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중고 미국차를 조달해서 히로시마와 도쿄에서 파는 것은 꽤 괜찮은 장사였다.

40살이 조금 안 되서는 요즘 말로 리사이클 샵 일을 시작했다. 가게이름은 ‘아히루야(오리집)’. 니시히로시마 바이패스 옆에 큰 간판을 세울 정도로 회사가 성장했다. 60살에 은퇴할 때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40살 무렵 맞선으로 아내·노리코와 결혼하여 세 딸을 얻었다.
모두 결혼을 하여 손자도 태어났다.

원폭 위령비의 북쪽, 현재는 평화의 연못이 된 곳에 서 있는 이종근씨(1955년 4월)

청년시절의 이종근씨(맨 앞)

 

아내 노리코씨와의 결혼식 기념사

 

 

 

증언자가 되다

 

2011년 무심코 신문을 읽다가 ‘세계일주 여행·피폭자는 승선 무료’라는 내용의 피스보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공짜로 세계일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응모했는데 선택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면담 때, 그때까지 한 번도 입밖으로 낸 적이 없는 피폭 체험을 이야기했다.

2012년 1월에 요코하마를 출항하는 배에 오른 사람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5명의 피폭자였다. 승객·승무원 1000명 이상, 100일 이상의 선박 여행. 출항 인사를 할 때 자신의 진짜 이름 ‘이종근’ 을 자칭했다. 당연히 그 이름으로 된 한국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1개국 22개 도시에 기항하고 그 중 12개 도시에서 증언을 했다. 선내에서도 말할 기회가 있었다. 몸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피폭자도 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증언 중에 구더기 얘기도 하게 됐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걸 몸소 체험한 내가 얘기 안 하면 안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피스보트에서 귀국한 후 스스로의 체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한국인 피폭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등을 떠민 것도 컸다.

2014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운영하는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가 위촉하는 ‘피폭 체험 증언자’가 되었다. 히로시마에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체험과 생각을 이야기하여 2022년까지 8년 동안 증언한 횟수는 288회를 거듭했다. 또 2015년부터는 ‘피폭 체험 전승자’ 양성에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고령을 이유로 사퇴한 2020년도까지 6년 동안 이종근씨와 직접 머리를 맞대고 배워서 전승자가 된 사람은 전국에 17명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를 항행 중인
선내에서의 증언(2012년 4월)

 

미국 반핵 단체의 초청으로 방문한
뉴욕의 고등학교 증언회에서(2013년 4월)

동포들을 위하여

 

2021년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훈장)을 받았다. 상장에는 “재외동포 권익신청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국민포장을 수여한다” 라고 적혀 있다.

미군에 의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희생자는 ‘일본인’ 뿐만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 조선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당시에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징용되었고, 그 중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노동하다가 피폭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뿐만 아니라 종전과 함께 조선반도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피폭자로 카운트조차 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1972년 한국인 피폭자가 지원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자 국가(구 후생성)는 “피폭자는 일본을 출국하면 원호 대상에서 제외된다” 고 통지했다. 이후에도 소송이 이어지고 국가 측의 패소가 계속됨으로써, 국가는 2003년에 겨우 통지를 폐지했다. 한국 등 해외에 있으면서도 수첩과 피폭자 수당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일본에 있는 피폭자와 거의 같은 수준의 원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최초의 제소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였다.

한국 원폭피해자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종근씨는 한국에 있는 피폭자들에 대한 충실한 원호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가해 역사나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 같은 피폭자로부터 “왜 일본을 깎아내리느냐” 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8월 5일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거행하는 위령제에는 매년 참석했다.

 

 

그날 피폭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반도 출신들은
같은 피폭자이면서
종전을 기점으로 외국인으로서 버려졌고
원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제가 피폭자로서 증언해온 것은,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날 피폭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반도 출신들은
같은 피폭자이면서
종전을 기점으로 외국인으로서 버려졌고
원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제가 피폭자로서 증언해온 것은,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원폭으로 화상을 입고 방사능도 맞으면서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원폭으로 화상을 입고 방사능도 맞으면서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을 해서 많은 외국인을 죽였다.
젊은 여러분들한테는
그런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
두 번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전쟁을 시작하거나 전쟁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이 소리 높여
핵무기 폐절을 이뤄냈으면 합니다.

 

 

 

 

일본은 전쟁을 해서 많은 외국인을 죽였다.
젊은 여러분들한테는
그런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
두 번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전쟁을 시작하거나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이 소리 높여
핵무기 폐절을 이뤄냈으면 합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미야자키 소노코

협력 미야자키 치요

한국어번역 송 승희

시미즈 게이코

 

히로시마, 얼굴

시미즈 게이코

 

 

나는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눈이
폐가
피가

몸 여기저기가
나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히바쿠샤(원폭 피해자)입니다” 라고.

 

 

나는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눈이
폐가
피가

몸 여기저기가
나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히바쿠샤(원폭 피해자)입니다” 라고.

 

  • Story.1
    Keiko Shimizu

시미즈 게이코 (결혼 전 이름・아키모토 게이코)

1943년(쇼와18년) 12월 23일 히로시마시 기리노키쵸(현재 미나미구)에서 태어난다.
1945년 3월 가모군 조가무라(현재 히가시히로시마시)의 친척집으로 피난. 아버지는 출정하여 부재중이었고 어머니는 임신중이었다.

1945년 8월 6일 어머니는 1년 7개월된 게이코씨를 등에 업고 빨래를 널고 있었다.
8시 15분 어머니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콰앙’하는 공기압과 같은 것을 느끼고 무심결에 자신과 딸의 머리에 세탁물을 씌워서 엎드렸다고 한다. 그것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마을에는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왔다. 마을사람이 총출동하여 간호하고 몸이 무거웠던 어머니도 그 일원으로서 함께 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졌고 그 당시에 어렸던 게이코씨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구마노(아키군 구마노쵸)에 있는 친척집에 맡길 생각으로 게이코씨를 데리고 히로시마역 주변을 방문한다. 결국 많은 친척들이 구마노 친척집에 의탁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구마노에는 맡길 수 없었지만, 이때 게이코씨가 방사능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살이 지났을 무렵부터 눈 상태가 나빠져 사시가 된다. 1946년 봄 무렵에는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단바라(히로시마시 미나미구) 집으로 이사해 친척도 함께 지내는 큰 살림살이가 된다.
그 후, 잇몸출혈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고 초등학생 때는 폐결핵과 늑막염을 앓아 장기 결석한 적도 있었다. 엄청난 코피를 쏟거나 설사와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인 다케시씨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사진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방문한 미야지마에서. 앞 줄 오른쪽 끝이 게이코씨

피난처인 조가무라에서 피폭자 구호에 종사한 어머니, 그 당시에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남동생.
원폭투하 후에 히로시마에 발을 디딘 어린 게이코씨.
세 사람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각각 다양한 고통을 짊어졌다.
웃는 얼굴이 귀여웠던 남동생이 그 후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954년 촬영.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맨 왼쪽이 게이코씨.
병을 앓아 몸은 약했지만,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시절

감성을 키운 어린시절

전쟁이 끝나고 10년 후인 1955년12월23일, 12살 생일에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당시에는 매주 오페레타 연습하러 다니고 있었다.

노래하기를 아주 좋아하고 음악공부도 잘 따라했던 게이코씨를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어린이 오페레타(극단)에 권유했다. 이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표현활동이 그 후 게이코씨를 낭독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어린이 오페레타 출연자와 함께.

 

 

1956년 1월 28일
추운 겨울 오후였습니다.

히로시마 시내의 어린이들이 노보리쵸중학교 에 모여

“원폭 어린이 동상을 만들자!”
학교와 학년을 뛰어넘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피폭하고 10년이 지나서 사망하게 된 사다코씨 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1956년 1월 28일
추운 겨울 오후였습니다.

히로시마 시내의 어린이들이 노보리쵸중학교 에 모여

“원폭 어린이 동상을 만들자!”
학교와 학년을 뛰어넘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피폭하고 10년이 지나서 사망하게 된 사다코씨 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 Story.2
    Keiko Shimizu

단바라 초등학교 5, 6학년 때의 담임인 오가타 시즈코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게이코씨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졸업문집을 만들고 있을 때, 오가타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각 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둘이서 다녀오면 좋겠어”

1956년 1월 28일 눈이 흩날리는 추운 날 오후, 노보리쵸중학교에서 가진 모임에는 히로시마 시내 대부분의 초등학교 아동회, 중·고등학교 학생회 멤버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원폭 투하하고 10년이 지나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사키 사다코씨의 동급생 이 ‘원폭어린이 동상’ 건립에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고, 참가자 전원 찬성으로 ‘히로시마평화를 구축하는 아동·학생회’ 가 탄생했다. 그 후 게이코씨도 친구와 함께 모임의 일원으로서 모금활동 등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해졌다.

이렇게 해서 많은 어린이들의 노력과 그것을 지지하는 어른들의 보이지 않는 서포트에 의해 ‘원폭어린이 동상’ 이 완성되었다. 1958년 5월 5일 제막식 행사에는 당시에 단바라중학교 3학년이었던 15살의 게이코씨도 참석했다.

 

은사 오가타 시즈코선생님을 회상하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교사 대부분이 전쟁에 나서던 당시, 여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18살의 오가타 선생님도 대용교원으로서 히로시마시 히로세국민학교 교단에 섰다. 폭심지로부터 약 1.2 km떨어진 히로세국민학교에서 피폭한 선생님은 거의 전신에 화상과 부상을 입는다.
그 후, 단바라초등학교로 이동하여 게이코씨가 5,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된다.
“선생님은 원폭 후유증으로 몸이 힘들면서도 자주 우리들을 평화자료관에 인솔해 주셨어요. 선생님의 생각은 내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어요” 1971년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선생님은 사망했다. 췌장암이었다.

어린이들의 힘으로 태어난 원폭어린이 동상

‘히로시마평화를 구축하는 아동·학생회’ 는 ‘원폭어린이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필두로, 기부자에게 감사장 작성, 피폭자 분의 문병, 원폭고아와 장애가 있는 어린이 시설 문병과 위문, 어린이 피폭자 실태조사, 평화학습과 토론 등 폭넓게 활동했다.
“영국과 헝가리 등 해외에서도 기부와 편지를 받았어요. 사무실로 사용한 노보리쵸중학교의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감사장을 썼죠. 히로시마의 어린이들이 시작한 활동이 일본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 나간 거예요”
어린이들의 활동은 영화 ‘천 마리 학’(1958년 제작/기무라 소토지 감독/공동 영화사)에도 담겨있다.

쥬코쿠신문사제공
1958년5월5일 ‘원폭어린이 동상’ 제막식
이 군중 속에 게이코씨도 있다

 

  • Story.3
    Keiko Shimizu

1964년 히로시마현립여자단기대학 국문과 졸업.
1966년부터 히로시마 현청에 근무, 1969년에 결혼 후 퇴직.
행복한 20대를 보냈지만 척수질병 발병,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다. 그리고 가끔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있어도 비교적 건강하게 보낸다.

1996년~1998년, 월드프렌드쉽센터에서 평화 가이드.
1999년부터 영어 낭독극 그룹 ‘오리엔더’에 소속.
60살이 지나 혈액 난치병에 걸리고 폐암도 발병.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게 된다.

게이코씨의 어머니는 전후 3년이 지나 자궁결핵 발생, 60대 후반부터는 직장암, 위암, 간암을 발병, 87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구호피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전에 게이코씨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병을 앓고 33살에 사망한 동생 다케시씨는 사망 후 해부하여 급성백혈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1945년 8월, 피폭자 구호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다케시씨. 이 일과 너무나도 이른 죽음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었을까?

전후 아버지는 피폭자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는 친척을 보고 세 사람의 피폭자 수첩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어머니도 남동생도 많은 질병을 앓았으니까 수첩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은 부담이 덜했을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2004년부터는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에서 낭독 자원봉사를 개시. 2013년~2015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평화학습강사 담당.
2017년부터는 낭독극 그룹 ‘PILE’ 을 주재.

질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게이코씨는 문화적인 접근으로 꾸준한 평화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Story.3
    Keiko Shimizu

1964년 히로시마현립여자단기대학 국문과 졸업.
1966년부터 히로시마 현청에 근무, 1969년에 결혼 후 퇴직.
행복한 20대를 보냈지만 척수질병 발병,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다. 그리고 가끔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있어도 비교적 건강하게 보낸다.

1996년~1998년, 월드프렌드쉽센터에서 평화 가이드.
1999년부터 영어 낭독극 그룹 ‘오리엔더’에 소속.
60살이 지나 혈액 난치병에 걸리고 폐암도 발병.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게 된다.

게이코씨의 어머니는 전후 3년이 지나 자궁결핵 발생, 60대 후반부터는 직장암, 위암, 간암을 발병, 87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구호피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전에 게이코씨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병을 앓고 33살에 사망한 동생 다케시씨는 사망 후 해부하여 급성백혈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1945년 8월, 피폭자 구호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다케시씨. 이 일과 너무나도 이른 죽음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었을까?

전후 아버지는 피폭자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는 친척을 보고 세 사람의 피폭자 수첩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어머니도 남동생도 많은 질병을 앓았으니까 수첩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은 부담이 덜했을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2004년부터는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에서 낭독 자원봉사를 개시. 2013년~2015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평화학습강사 담당.
2017년부터는 낭독극 그룹 ‘PILE’ 을 주재.

질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게이코씨는 문화적인 접근으로 꾸준한 평화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원폭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힘으로
‘원폭어린이 동상’ 이 태어난 것처럼

불타버린 들판이었던 ヒロシマ(히로시마)가
살아남은 시민의 힘으로
푸른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은 작은 존재이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들이 만드는 것.

목소리를 높여 행동합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 를 찾아서.

 

 

영원한 푸르름 / 하라 다미키

히로시마의 델타에
어린 잎 소용돌이
죽음과 불꽃의 기억에
좋은 기도여 깃들라

영원한 푸르름을
영원한 푸르름을

히로시마의 델타에
푸른 잎 늘어뜨리라

 

“하라 다미키 시집” 1951.7 ‘작은기도’ (시오분샤)에서

 

 

 

 

 

 

원폭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힘으로
‘원폭어린이 동상’ 이 태어난 것처럼

불타버린 들판이었던 ヒロシマ(히로시마)가
살아남은 시민의 힘으로
푸른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은 작은 존재이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들이 만드는 것.

목소리를 높여 행동합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 를 찾아서.


영원한 푸르름 / 하라 다미키

히로시마의 델타에
어린 잎 소용돌이
죽음과 불꽃의 기억에
좋은 기도여 깃들라

영원한 푸르름을
영원한 푸르름을

히로시마의 델타에
푸른 잎 늘어뜨리라

 

“하라 다미키 시집” 1951.7 ‘작은기도’ (시오분샤)에서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

오카다 에미코

 

히로시마, 얼굴

오카다 에미코

 

 

12살이었던 언니는
그날 아침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나서 집을 나섰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는
집을 나간 채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지.

상상해 보렴

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는다고.

12살이었던 언니는
그날 아침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나서 집을 나섰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는
집을 나간 채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지.

상상해 보렴

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는다고.

 

Profile

오카다 에미코 (결혼 전 이름: 나카사코 에미코)

1937년(쇼와 12년) 1월 1일, 히로시마시 히가시구 오나가초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어머니, 4 살 위 언니와 3 살, 5 살인 어린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였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8 살에 원자폭탄에 노출. 당시 12살이던 언니는 그날 건물소개(방화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건물을 강제철거하는 일)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에미코씨는 히지야마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양재학교로.

전쟁 중에 마츠모토 공업고등학교(현 세토우치 고등학교)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딸을 잃은 괴로움과 더불어 군사교육을 했던 사람이 민주주의 교육으로 전향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퇴직. 공구점을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 도산. 부모님은 도쿄에 있는 아들을 의지해 상경하여 히로시마에는 에미코씨만 남는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양재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살려 양장점을 개업. 매일 생업에 쫓기는 와중에 결혼하고 미친듯이 생활한다. 그 후, 생계가 안정되고 두 아이를 갖게 되지만, 중학교 1학년이 된 장남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그 깊은 슬픔을 계기로 패션 일에서 물러난다.

1987년 50살 때 미국에서 평화를 위해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세계우정센터(WFC)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고 응모. 피폭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행이 결정되고 일본문화를 소개하게 됨. 미국에서 바바라 레이놀즈씨와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평화활동에 눈뜨게 되고, 히로시마의 원자폭탄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오키나와전투, 난징대학살,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지뢰 등에 대해서도 자주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1999년부터 히로시마평화자원봉사활동 개시,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에서 원자폭탄피해 체험 증언 시작.
2001년, 우크라이나 키우이에서 원자폭탄피해 증언. 원자력발전소 사고 피해자와 만나다.
2005년, 원자폭탄피해 60주년 프로젝트‘히로시마 세계평화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건너가다.
2007년, 전미원자폭탄전람회에서 원자폭탄피해에 대해 증언하다.
2009년, 손주와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유엔본부에서 원자폭탄피해에 대해 증언하다.
영화‘아토믹 맘’에 출연.
근래에는 히바쿠샤(원폭피해자) 국제서명과 핵무기금지조약채택을 위한 긴급행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2021년4월, WFC 모임 참가 중 서거. 향년 82세.

 

 

가족사진 1

사진 왼쪽부터 언니, 미에코씨, 남동생, 어머니, 뒤는 아버지

 

에미코씨의 언니인 나카사코 미에코씨는 1945년 당시 12살이었다. 히로시마 제일현립여 의 학생으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서 비밀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저 평범하고 사이 좋은 자매였어” 언니는 8월 6일 아침에 건물소개 하러 나간 채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도하시 는 건물소개를 위해 모이는 집합장소였어요. 거기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언니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전혀 몰라요. 혼자서 갈팡질팡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기를 기도해요.”

언니의 편지

부모님은 언니인 미에코씨의 행방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어딘가에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엄마는 당시에 임신 중이었는데 유산을 했지. 부모님은 언니의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공양탑에 언니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건물소개로 동원되어 한 발의 원자폭탄에 불타 죽어간 어린이들. 그 수는 약 6,000명이라고 한다. “생각해 봐. 12살, 13살 정도라고 하면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그 아이들이 썼던 모자, 제복, 단추, 학교 휘장···. 자료관 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 아니야. 모두 유품이지.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돼” 에미코씨 수중에는 언니 미에코씨가 쓴 편지가 남아 있다. “언니가 출정하는 사촌 앞으로 쓴 편지가 되돌아 왔어. 언니의 유품은 이것뿐이에요. 유골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거든”

“나는 말야, 지금도 현관 열쇠를 열어둔 채로 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언니 잘 다녀왔어?’ 하고 말하고 싶어서”

 

 

 

 

 

 

8 살에 원자폭탄 방사능에 노출되었잖아요.

그리고 12년이 지나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던거야.

“원자폭탄이란 게 뭐지?”
“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거지?”

그때까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8 살에 원자폭탄 방사능에 노출되었잖아요.

그리고 12년이 지나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던거야.

“원자폭탄이란 게 뭐지?”
“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거지?”

그때까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피폭 후, 에미코씨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머리카락이 빠졌어.
피곤해서 자주 누웠지.
당시에는 방사선 피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거야”
20 살 때,
처음 진단받은 재생불량성 빈혈,
피폭자 대부분에게서 이 증상이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불안은 피폭 2세에도 나타난다.

 

 

가족 사진 2

에미코씨는 24살에 결혼해서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를 갖게 되었다.
전후 어려운 시절에 양재기술을 살려서 계속 일한 보람이 있어 백화점에 점포를 열 수 있었다.
“아이들이 크면 패션 빌딩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그러나 어느 날 그 꿈을 산산조각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불단 앞에 앉아서 술에 젖을 정도로 마셨어. 일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서 말야” 패션계를 떠난 에미코씨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이들의 七五三기념으로. 아들, 딸과 에미코씨

 

평화활동에 대한 각성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세계우정센터 창시자인 바바라 레이놀즈씨. 중앙이 에미코씨.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패션 업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에미코씨는,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기사를 보게 된다. “당신은 세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세계우정센터 가 아메리카에서 평화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세계 평화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이력서에 기재한 특기‘일본무용, 다도, 꽃꽂이’가 담당자의 눈에 띄어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87년 오카다 에미코 50살에 도미. 이것이 평화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피폭체험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돌아오는 말이“진주만이 먼저다”거기에서 오카다씨는 원자폭탄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히로시마의 피폭자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피폭체험과
ヒロシマ(히로시마)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해서
끝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세상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히로시마의 피폭자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피폭체험과
ヒロシマ(히로시마)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해서
끝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세상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피폭 증언을

자료를 손에 들고 피폭증언을 하는 에미코씨

2000년 에미코씨는 쥬노회 의 가이 히토시씨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방문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희생자들 앞에서 히로시마 피폭자를 대표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집회소와 같은 장소에는 원전사고로 사망한 어린이들의 사진이 다수 장식되어 있었다. 키이우는 원전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10km가까이 떨어져 있지만, 인근 초등학교에서는 그 당시의 재학생 대부분이 갑상선암에 걸렸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되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야” 언니와 아들을 잃은 오카타씨의 아픈 과거는 전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방사능에 의한 피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된 히로시마와 우크라이나. 원폭피해자인 에미코씨가 원폭의 참상을 딛고 키이우를 방문한 것, 그 자체가 키이우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첫 손주와 함께 유엔으로

2009년에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회의에 첫 손주와 함께 참석. 각국의 시장들 앞에서 두 사람이 각각 연설을 하였다.
“각국의 시장님이 손주에게 말을 걸어 주셨어요. 평화라는 게 이런 거라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박수. 무릎을 맞대고 대화하는 가운데 평화가 태어난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에미코씨는 피폭 증언장에 설 때도 자신의 피폭체험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 세계에서 보고 온 것, 핵무기를 둘러싼 세계의 상황도 담아 글로벌한 시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세를 고수했다.

 

 

 

 

 

오바마씨가 히로시마에 왔을 때, 기자가 물었어.
“사죄하길 바라세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오바마씨가 사죄해서 언니가 돌아온다면 사죄하기를 바라죠” 라고.

언니는 돌아오지 않잖아요.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렇지만 미래는 앞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2016년 5월 27일, 제44대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씨가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아메리카 현직 대통령이
피폭지를 방문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편집・제작 NPO법인ANT-Hiroshima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