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시타 히로무

 

히로시마, 얼굴

모리시타 히로무

 

 

결혼하고 처음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압도당했습니다.

눈도 뜨지 않은 듯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딸이
필사적으로 젖가슴에 매달리는
그 생명력에

그리고 딸이 잠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아이가
오버랩되어 보였던거죠.

그때 내 안에 있던 강한 생각이
북받쳐 올라왔어요.

이제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을 해야 한다고.

결혼하고 처음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저는 압도당했습니다.

눈도 뜨지 않은 듯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딸이
필사적으로 젖가슴에 매달리는
그 생명력에

그리고 딸이 잠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아이가
오버랩되어 보였던거죠.

그때 내 안에 있던 강한 생각이
북받쳐 올라왔어요.

이제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체험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말을 해야 한다고.

 

  • Profile
    Hiromu Morishita

森下 弘 (모리시타 히로무)

1930년(쇼와 5년) 10월 26일 도요타군 나카노무라(현 오사키 가미지마쵸)에서 출생. 부모님, 조부모님, 2살, 7살 어린 두 여동생과 함께 사는 일곱 가족이었다. 4살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히로시마시 오시바진죠초등학교로 전근가게 되어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했다. 일본은 쇼와 대공황을 거쳐 청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년)에 돌입하여 군국주의적인 전시색으로 물든 세상에서 자라게 된다. 하쿠시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히로시마제일중학교(현 히로시마 고쿠타이지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농촌 근로봉사, 히로시마항공, 도요공업에 동원되어 공부 대신 오로지 일만 하게 된다.

제일중학교 3학년이던 1945년 8월 6일 폭심지에서 1.5㎞ 떨어진 건물소개 작업 중 갑자기 섬광이 번쩍하면서 피폭되었다. 얼굴과 손에 큰 화상을 입었다. 어머니는 니시하쿠시마쵸 집에서 건물에 깔려 불에 타 죽었다. 아버지는 미츠비시 공장(출장처인 구사츠의 절), 큰 여동생은 구두공장(미사사)에서 피폭되었지만 무사했고, 작은 여동생은 이무로에 소개해 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날, 가와우치무라(현 아사미나미구)에 있는 지인의 집에 도착해 약 2개월 동안은 화상 치료를 했다. 10월이 되어서는 할머니가 피난간 미부쵸(현 야마가타군 기타히로시마쵸)의 삼촌 집에서 요양을 하고, 다음 해인 1946년 1월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기온의 기숙사로 옮겨 그 여름에 얼굴과 목에 있는 켈로이드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데이신병원에서 두 번의 수술을 받게 된다.

사춘기에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다정함과 낭만과 같은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1948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이듬해 학제개편으로 히로시마대학 문학부 국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재학중 결핵을 앓아 요양과 휴학을 반복하면서도 시를 쓰고 소설을 집필하는 창작활동에 몰두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나날을 달랬다.
1955년 봄,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폭으로 켈로이드가 생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립고등학교의 서예교사가 된 후에도 피폭체험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1961년에 결혼해서 2년 만에 태어난 큰 딸이 젖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강력한 생명력을 느끼고 “다시는 아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고 피폭 체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게 된다.

1964년 바바라 레이놀즈씨(나중에 평화단체 월드 프렌드십 센터를 설립, 1990년 사망)가 기획한 제2차 세계평화순례에 처음 참가하면서 서방과 소련(당시) 등을 다니며 핵폐기를 호소했다. 미국에서는 원폭 투하를 결단한 트루먼 전 대통령과도 면담했다. 귀국 후에는 고등학생 등을 대상으로 원폭의식조사를 실시하고 온 힘을 다해 피폭교사 모임을 설립, 2012년까지 오랫동안 WFC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예가로서 1981년에 히로시마를 방문한 교황의 평화를 어필하는 비문을 썼다. ‘전쟁은 인간의 짓입니다’로 시작되는 비문을 새긴 비석은 지금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흔들리는 세계에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983년에 시집 ‘히로시마의 얼굴’을 출판. 1990년에 30년간 근무한 현립 하츠카이치고등학교를 퇴직한 후, 시마네대학, 히로시마분쿄여자대학(현 히로시마분쿄대학)에서 서예를 가르쳤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날부터 인생의
모든 것이 미쳐버리다

 

 

▲쇼와 11년(1936년) 11월 3일,
하쿠시마에 살았 때의 가족 사진.
6살 무렵의 모리시타씨 (사진 중앙)

1945년 8월 6일 제일중학교 3학년, 14살이었던 모리시타씨는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의사한테 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일단 출석해서 다음날부터 쉬겠다는 말을 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마지못해 나가게 되었다. 폭심지에서 약 1.5킬로 떨어진 쓰루미바시 옆에서 건물소개 작업하던 중에 갑자기 섬광이 번쩍이었고 “너무나도 뜨거워서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진 것 같았다”.

얼굴과 목에 큰 화상을 입었고 주변 친구들도 얼굴이 벗겨져 있었다. 도망치면서 유령처럼 손을 내민 군인들의 대열과 검게 탄 유아의 사체를 보았다. 집이 있는 니시하쿠시마쵸는 육군시설이 모여있는 모토마치 근처라서 폭심지에서 너무 가까웠다.
그날 아침, 현관 앞에서 배웅해 준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주워온 산산조각난 어머니의 뼈 조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상처의 고통에 지쳐버린 나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서)

▲ ‘쇼와 6년 (1931년) 5월 3일’
이라고 기록된 사진. 생후 6개월 무렵

▼‘쇼와 18년(1943년) 2월’ 이라고 기록된 13살,
히로시마제일중학교 1학년

<아버지가 주워온 산산조각난 어머니의 뼈 조각을 앞에 두고 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통곡한다 상처의 고통에 지쳐버린 나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서)

어머니를 잃고
켈로이드가 남았다

―마음과 몸에 남겨진 상처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은 사춘기가 될수록 커져만 갔다. 현관 앞에서 상냥하게 배웅해 주던 어머니가 며칠 후에 백골로 변해 버렸다. 14살의 소년에게는 잔혹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나타나실 것 같아서요. 나를 지켜봐 주는 존재, 상냥함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졌습니다” 원폭으로 히로시마 거리는 붕괴되었다.

“형태가 있는 것은 무너지고 파괴되어 버리는 것인가” 라는 허무감을 지우기라도 하듯 모리시타씨는 ‘영원한 것’ ‘소멸하지 않는 것’ 에 대한 로망을 추구해 간다.
한편으로는 얼굴과 목에 남아 있는 켈로이드는 ‘눈에 보이는 트라우마’가 되어 모리시타씨를 계속 괴롭혔다. 주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거울을 보는 것이 싫었다. 도저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돔 그것은 나의 켈로이드 벗어날 수 없는 족쇄 파괴하고 싶지만 파괴되지 않는 세계가 무너질테니까>. 시집‘히로시마의 얼굴’에는 원폭 돔을 자신의 켈로이드에 비유하여 고뇌를 토로한 시가 실려 있다.

▲피폭 후의 모리시타씨

▲1946년 히로시마 육군병원 에바분원 터에서. 원폭투하 후 처음으로 학우들과 만났다. “이미 죽은 친구도 있고 나처럼 가족을 잃은 사람, 화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군국교육의 가치관도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 재회를 순순히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으악!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모리시타씨가 피폭체험을 그린 그림. 자신이 본 참상, 체험에 더해 친구들한테 들은 체험도 같이 그렸다. 섬광, 열선. 순식간에 우리 70명의 학생들은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졌다. 그리고 열풍이…(쓰루미바시 서쪽 끝, 폭심지에서 1.5km)라는 문장이 같이 쓰여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소장·제공)

▲모리시타씨가 피폭체험을 그린 그림. 자신이 본 참상, 체험에 더해 친구들한테 들은 체험도 같이 그렸다. 섬광, 열선. 순식간에 우리 70명의 학생들은 거대한 용광로에 던져졌다. 그리고 열풍이…(쓰루미바시 서쪽 끝, 폭심지에서 1.5km)라는 문장이 같이 쓰여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소장·제공)

 

 

아버지는 자주 ‘대머리 그대로의 깨달음’이라는 말을
얘기해 주셨어요.

젊었을 때부터 대머리였던 어느 스님이 있었어.
그 외모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켈로이드로 고민하는
나를 위로해 주셨던거에요.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지…
그리고 나는 문학, 시, 단가로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대머리 그대로의 깨달음’이라는 말을
얘기해 주셨어요.

젊었을 때부터
대머리였던 어느 스님이 있었어.
그 외모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켈로이드로 고민하는
나를 위로해 주셨던거에요.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면 되지…
그리고 나는 문학, 시, 단가로
내면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으로 구원을 찾아서

일상을 깊이 통찰하고
감성을 갈고닦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현재의 히로시마대학 교육학부) 재학중인 모리시타씨

▲히로시마 옛 육군 군복공장은 1946년부터
몇 년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캠퍼스로 사용되었다. 당시 육군 군복공장의 희귀한 사진

켈로이드 때문에 고민하는 아들의 고뇌를 알고 있던 아버지는 바꿀 수 없는 외모에 괴로워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 좋겠다고 계속 격려해 주었다. 이러한 격려가 이후의 인생에 “내면적으로 깊게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라며 모리시타씨는 아버지에게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히로시마대학 문학부에 재학하면서 시와 소설 쓰기에 몰두하게 되지만 결핵에 걸려 요양을 계속하면서 졸업까지 6년이 걸렸다.

“병상에서 심심할 텐데 단가를 지어보면 어떻겠냐”는 친구의 권유로 모임에 들어가 단가 창작에 열중했다. 그 모임은 인생에서‘아름다움’을 찾는 탐미파. 체온계로 체온을 재고 수은의 눈금이 올라가면 열이 있다 =‘나쁨’이겠지만 그 움직임 자체를‘아름답다’고 본다. 일상을 관찰함으로써 감성이 갈고 닦여졌다. 잡지에 투고하거나 비평회에 참가하면서 병상의 소일거리였던 단가를 짓는 일은 어느 사이에 모리시타씨 삶의 보람이 되었고, 그 후 시를 짓거나 서예라는 창작 활동에 힘이 되었다.

교직에 종사하려고 했던 무렵 히로시마 피폭자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 가와모토 이치로씨(사진 안쪽 중앙), 요시카와 이쿠미씨(사진 앞줄 중앙)와 만나 영향을 받게 된다. 사진 오른쪽이 모리시타씨

▲교직에 종사하려고 했던 무렵 히로시마 피폭자 역사를 말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 가와모토 이치로씨(사진 안쪽 중앙), 요시카와 이쿠미씨(사진 앞줄 중앙)와 만나 영향을 받게 된다. 사진 오른쪽이 모리시타씨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서다

피폭한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의 사진.
결핵 치료로 교단에 서는 것은 1주일에 며칠뿐이었다

◀오시타가쿠엔 기온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의 사진.
결핵 치료로 교단에 서는 것은 1주일에 며칠뿐이었다

전쟁 후 10년이 지난 1956년에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원자력평화이용박람회가 열렸다. 모리시타씨는 여학교의 인솔 교사로 방문하게 되었다. “질병을 추적한다(방사성 동위원소), 비행기와 배의 큰 에너지가 된다. 원자력은 훌륭하다고 하는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료관에 피폭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켈로이드 표본과 열선으로 녹아버린 유물 등의 전시물을 보고 “무섭다 무서워” “오늘 밤은 잠을 잘 수가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여학생들이 속삭였다. 교사가 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들 교단에 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켈로이드도. 추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닐까?”
피폭 얘기를 피하게 되면서 교단을 떠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교원이 되었을 때의 모리시타씨. 히로시마대학 재학중에 결핵을 앓고 기흉 치료를 하는 등 장기 요양을 피할 수 없었던 경험에서 병상을 벗어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교원이 되었을 때의 모리시타씨. 히로시마대학 재학중에 결핵을 앓고 기흉 치료를 하는 등 장기 요양을 피할 수 없었던 경험에서 병상을 벗어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기뻤다고 한다

 

 

지친 밤 끝자락에
강은 더러워지고 거리는 겁에 질려
돔 위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명하여
제물의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나무 끝자락처럼
붙여진 생명

그래서
지도도 없이
떠난 영혼은
상냥하게 치장한
히로시마와 재회해도
수줍게 망설인다

 

‘녹색의 돔’ 일부 발췌
모리시타 히로무의 시집 ‘히로시마의 얼굴’에서

 

 

딸의 탄생

모든 아이들을 위해 말해야지

▲히로시마 현립하츠카이치고등학교에서 서예 교사 시절.
피폭 교사로서 평화교육도 시작하고 심혈을 기울였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은 벌거벗는 것을 좋아하지만
옷을 벗게 해서는 안돼
시커멓게 탄 아기가 되살아난다”
모리시타씨의 서예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전쟁은 한국전쟁(1950년)으로 배신당했다. 또 자신을 괴롭혔던 원폭이 사용되는 것인가? 켈로이드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앞장서서 반대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전운동가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켈로이드를‘내세우는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생각을 극복할 수 없었다.

현립고등학교에서 서예 교사가 되고 나서도 일상을 힘껏 열심히 사느라 굳이 과거를 되돌아 보지 않았지만, 30살 넘어 결혼해 아이가 생긴 것이 전환기가 되었다. 필사적으로 아내의 젖가슴에 매달리는 딸의 모습에 힘찬 생명력과 행복을 느끼는 동시에 피폭 후 불탄 자리에서 본 까맣게 탄 유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들한테 다시는 그런 봉변을 당하게 해서는 안돼” 피폭 체험을 말하는 것에서 도망치던 자신이 눈도 뜨지 않은 큰딸에게 등 떠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증언 활동을 시작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아내 히사코씨하고 세 아이들
가족은 항상 모리시타씨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차녀, 장남과 함께

◀〈사진 왼쪽〉
아내 히사코씨하고 세 아이들
가족은 항상 모리시타씨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사진 오른쪽〉
차녀, 장남과 함께

평화활동의 서막

바바라 레이놀즈씨와의 만남

▲바바라씨(사진 중앙)와 오구라 가오루씨(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사무국장,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관장을 역임한 히로시마시 직원. 1979년 사망)와 함께 찍은 모리시타씨(사진 오른쪽)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평화순례 출발 전에 한 컷
사진 오른쪽이 아내 히사코씨
사진 중앙은 아버지와 장녀
왼쪽은 히사코씨의 어머니

바바라 레이놀즈씨(1915-1990)는 ABCC(원폭상해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는 남편 일로 1951년 일본에 건너온 주부였지만, 히로시마에서 피폭자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분주하게 평화 활동을 하게 된다. 1965년 평화 단체‘월드프렌드쉽센터’(WFC)를 히로시마 시내에 설립하고 1969년 귀국 후에도 미국에서 반전, 반핵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만나보면 상냥한 아줌마예요. 하지만 사재를 털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감명을 받게 돼요” 라는 모리시타씨. WFC의 이사장을 2012년까지 오랫동안 역임한 것도 바바라씨에 대한 경애하는 마음과 피폭자 치료에 힘쓴 초대 이사장이며 외과의사인 하라다 도민씨(1912-1999) 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시타씨가 피폭 체험을 말하기로 결심한 1960년대는 쿠바 위기(1962년)와 중국의 핵실험(1964년) 등 핵무기를 둘러싼 움직임이 긴박했다. 그러던 중, 바바라 레이놀즈씨가 기획한 세계평화순례를 알고 처음으로 참가하여 75일간 피폭자들 십여 명과 통역가와 함께 미국, 프랑스, 소련(당시)등 8개국을 돌면서 핵무기 폐기를 호소했다.

어머니를 빼앗고 피폭자로 모리시타씨를 괴롭혔던 미국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한 저항감은 없었다. 또 미국의 NGO 관계자인 선의의 사람들이 순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미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호기심도 뒷받침했다.

 

 

 

 

‘Forgive me, Forgive me !’
(용서해 줘, 용서해 줘)

평화순례로 방문한 미국에서,
평화회의가 끝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였어요.

나이든 미국인 남성이 다가와서,
큰 몸을 흔들며 펑펑 우는 거예요.

피폭 증언을 듣고,
참기 힘든 기분이었겠지요.

미국에도 있거든요.
원폭의 끔찍함에 눈물 흘리며 반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Forgive me, Forgive me !’
(용서해 줘, 용서해 줘)

평화순례로 방문한 미국에서,
평화회의가 끝나고 교회에서 기도할 때였어요.

나이든 미국인 남성이 다가와서,
큰 몸을 흔들며 펑펑 우는 거예요.

피폭 증언을 듣고,
참기 힘든 기분이었겠지요.

미국에도 있거든요.
원폭의 끔찍함에 눈물 흘리며
반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피폭자로서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단상에서 인터뷰를 받는 형식을 취했다. 일본에서 건너간 모리시타씨를 포함한 피폭자 일행은 그 밑에서 숨을 죽이고 줄곧 지켜보았다
(트루만 도서관에서)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잡고 소감을 적은 귀중한 메모.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면담을 마친 후의 모리시타씨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 면담 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붓을 잡고 소감을 적은 귀중한 메모.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1964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바바라씨의 노력으로 전쟁 중에 ‘귀축미영(마귀와 짐승같은 미국영국)’ 의 상징이었던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이 실현되었다. 트루먼씨와 방문 단장, 통역 3명이 무대에서 대면하고, 모리시타씨와 그 일행은 객석에서 지켜 보았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한다”
전쟁으로도 원폭투하로도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발언이었다. 많은 미군의 목숨을 구하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했다고 암암리에 말하고 싶었나? 하고 나중에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자신이 만든 국제연합을 통해 국제적인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며 불과 3분간의 면담은 끝났다.

트루먼 본인이 피폭자 앞에 나온 것만도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피폭자 입장에서 보면 허탕이었다. 모리시타씨도 실망감을 당시의 메모에 적고 있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어요. 원폭 투하를 결정했을 때 어린 아이들이 머리를 스쳐지 않은 걸까요?”

90살을 넘어서

생명이 있는 한 계속해서 공유하다

미국의 퇴역재향군인회 자리에서 “우리 주장이 옳다”며 트루먼과 같은 대응을 했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원폭 투하가 전쟁의 종식을 앞당긴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폭자의 목소리가 피폭지뿐만 아니라 세계에 닿아 공감해 주는 외국인이 있다는 데 큰 의의를 느꼈다.

오랜 피폭 증언활동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찬물을 끼얹은 형태가 되었지만, 모리시타씨는 온라인으로도 증언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90살이 넘어 잘 들리지 않고 걷기도 힘들고 체력이 저하되는 것은 감출 수 없다. 그래도 증언하려는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그해 여름 잔혹한 빛과 열로 절명한 아이들, 평화활동에 반생을 바친 바바라씨, 원폭을 모르는 지금의 아이들…. 자택에 보관되어 있는 메모와 기록, 스크랩 등 수만 점의 자료는 그날부터 평화를 염원해 온 히바쿠샤(피폭자) 모리시타 히로무의 결정체이다.

▲서예가로서의 모리시타씨의 대표작 중의 하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전시된 비석에 쓰여 있는 비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1년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 평화를 호소하여 “피폭자로서 반핵, 반전 활동하는데 뒷배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문의 휘호를 부탁받고 몇 번이나 고쳐 쓰며 정성껏 마무리했다.

▲자택에는 히로시마, 평화, 원폭, 서예와 시, 문학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이 보관되어 있다

▼자택 2층 서재에서. 여기에서 온라인으로 증언 활동도 하고 있다.

 

 

 

 

“나 또한 피폭자입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히로시마시 나카구) 옆에 묵묵히 세워져 있는 바바라씨 기념비에 생전의 말을 휘호한 것도 모리시타씨이다. 서예가로서의 아호는 모리시타 세이즈루.
지금도 틈틈이 붓을 잡고 있다.

 

 

 

“나 또한 피폭자입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히로시마시 나카구) 옆에 묵묵히 세워져 있는 바바라씨 기념비에 생전의 말을 휘호한 것도 모리시타씨이다. 서예가로서의 아호는 모리시타 세이즈루.
지금도 틈틈이 붓을 잡고 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야마모토 요시노부・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