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다 나나오

 

히로시마, 얼굴

가마다 나나오

 

 

진찰실과 요양시설에서
지금까지 많은 피폭자 분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선생님’이라고 합니다만,
그분들이야말로 나의‘선생님’입니다.

 

 

진찰실과 요양시설에서
지금까지 많은 피폭자 분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선생님’이라고 합니다만,
그분들이야말로 나의‘선생님’입니다.

 

  • Story.1
    Nanao Kamada

가마다 나나오

1937년(쇼와12년) 3월 20일, 만주 봉천(지금의 중국 선양)에 사는 가마다 집안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 회사를 경영하고 가족 일가는 일본인 마을에서 평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갓난아기였던 나나오씨를 안고 달래 주었다는 가마다 집안의 장남 마사미는 만주 의과대학(현재 중국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졸업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장남을 잃은 부모님의 슬픔은 깊었고 나나오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의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1945년 당시 여덟 살이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15일에 종전을 맞이했고 일본은 전쟁에 패했다. 그리고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본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와 셋째 형인 사부로씨가 마을 주변에 2km의 전기 울타리를 세울 정도로 생활환경은 엄중한 경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는 지병인 결핵이 재발하여 1946년 5월 6일에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긴 선박 여행을 거쳐 센자키(현재의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 도착하여 1946년 7월 17일에 가마다 가문의 발원지인 가고시마에 다다른다. 나나오씨는 익숙하지 않은 가고시마 사투리에 당황했지만 서서히 적응하였고 타고난 활발한 성격으로 초·중학교에서 스포츠와 공부에 열중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어머니와 함께 돈을 벌러 나갔던 셋째 형인 사부로씨가 있는 후쿠오카현 다가와시로 이사하여 현립 다가와 히가시고교(현 후쿠오카 현립 도요고등학교) 에 진학했다. 의학의 길을 걷고자 수험잡지인‘게이세쓰 지다이’를 읽고 히로시마대학을 목표로 정했지만 수험 경쟁률이 7.2배나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형의 도움을 받는 가정형편으로는“재수를 할 선택지가 없다”. 너무 높은 경쟁률에 불안감이 스쳐 아버지를 대신했던 형에게 중얼거리자“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격려해 주었다. 형의 말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수험에 합격했다. 여기서부터 나나오씨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만주에서 규슈로, 시대의 파도를 넘어

아버지 마사요시씨는 1890년에 사쓰마반도 이자쿠 마을(현재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서 태어났다. 차남으로 태어나 농지를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흐름에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장남인 마사오씨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의학의 길을 목표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1939년에 병사. 그 길을 나나오씨가 이어받았다.

 

아버지를 여윈 후 부모님을 대신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셋째 형 사부로씨와 부친의 부재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키워주신 어머니 소메씨.
어머니가 1952년 2번째 뇌졸중 후 찍은 사진

아버지를 여윈 후 부모님을 대신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셋째 형 사부로씨와 부친의 부재에도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키워주신 어머니 소메씨.
어머니가 1952년 2번째 뇌졸중 후 찍은 사진

만주에서의 안정된 생활은 일본이 패전한 후 완전히 달라졌다. 믿었던 지인들의 배신, 일본인 마을을 서성거렸던 러시아군과 팔로군 ,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유골과 몸뚱이 하나만으로 일본으로 돌아온 가족… 그곳에는 비참함, 억울함, 슬픔, 불안감 등 여러 기분이 뒤섞여 있었다. 훗날 의사로서 많은 피폭자와 만나고 때로는 임종을 지켜보게 된 나나오씨. “사람들의 고통에 다가가는 인간으로서의 밑바탕은 유년기의 경험에서 길러졌는지도 모릅니다”.

응원과 기대에 힘입어 의학의 길로

의사가 된 나나오씨는 1998년 신기하게도 가마다 집안의 장남인 마사미씨의 모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때 형제들도 모두 도항하여 그리운 땅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무츠오, 나나오, 사부로, 이츠오).

 

가마다 형제 간에 근황을 공유한
가마다 집안의 뉴스레터‘츠도이’

 

어렸을 때 고생을 함께 하면서 항상 나나오씨를 도와주었던 형들은 성인되어서는 각자 다른 현에서 생활한다. 떨어져 살아도 서로 근황을 알리고자 글쓰기를 좋아하는 형들이 형제 뉴스레터를 기획하여 1961년부터 2005년까지 44년 동안 문면으로 계속 교류했다. “나는 연구로 바빠서 좀처럼 근황을 전하지 못해 형님들한테 자주 재촉받았지요 (웃음). 그래도 형님들이 착실하게 보내줘서 지금은 당시를 생각하는 좋은 기록이 되어 우리들의 재산이 되었어요”. 문장과 자료를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소중히 여긴 나나오 의사의 꼼꼼함은 형제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 Story.2
    Nanao Kamada

높은 경쟁률을 뚫고 1955년 히로시마대학교의 의과대학에 훌륭하게 합격.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과 어머니, 형제들의 기대에 부응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피폭하고 10년이 지나고나서 히로시마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히로시마 시내는 텅 빈 넓은 대로(현재 헤이와오도리)가 동서로 뻗어 있었고 강을 따라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열차를 탔더니 한 여름인데 긴 소매를 입고 있는 사람, 모자를 눈 깊숙이 내려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아, 피폭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피폭의 그림자가 아직 짙게 남아 있었다.

세 형님들이 보내주는 학비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 장학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의학 전문서를 구입하는 지출은 아끼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동시에 요트부에 들어가 연습에도 열중했다. 1960년 23살이 되었을 때, 제1회 미야지마 일주 요트 레이스에서 2인승 스나이프급으로 무려 우승. 이 요트부에서의 인맥이 나중에 나나오씨의 장래를 크게 바꾸게 된다.

대학 졸업 후, 1961년 후쿠오카현에 있는 규슈 고세이넨킨병원(현 JCHO 규슈병원)에서 1년간 인턴으로 근무했다. 처음에는 외과를 지망했다. “외과가 내 성격에 맞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당시에는 수술용 장갑이 없어서 수술을 할 때마다 손을 수세미로 문질러서 씻는데 그러다 보니 손에 염증이 생기는 거야. 피부염이었던 거지”. 이렇게는 외과를 지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요트부 시절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기로 와라”선배가 소속된 곳은 같은 해, 히로시마대학에 설치된 지 얼마 안된 원폭 방사능 의학 연구소(원의연)였다. 다음 해 4월1일에는 대학병원에 피폭내과가 신설된다고 했다. 전국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아직 드문 부문이었기에 미지의 분야에서 일할 것을 생각하니 나나오씨의 마음이 움직였다.

1962년 25살이 되었을 때, 히로시마대학 의학연구∙임상 제1연구부문 피폭내과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부문 초대교수인 도모나가 마사노부씨와 만나게 된다. 도모나가 교수는 나가사키 의과대학 출신으로 혈액내과학 전문가로 유명한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후배이면서 주치의이기도 한 의사였다. 원폭 피폭자의 백혈병과 일반 백혈병과는 다른 건가? 원폭 피폭자의 백혈병이 발병하는 메커니즘을 밝혀내기 위해 도모나가 교수는 나나오씨에게 염색체 연구를 지시했다.

오전에는 히로시마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피폭내과에서 외래를 담당하고 오후에는 입원병동 환자를 진료했다. 염색체 연구는 밤 늦게까지 매진했다. 연구동료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원폭 피폭자 혈액 속에서 만성골수성 백혈병에서 발견되는 필라델피아 염색체를 발견했다. 1962년 11월에는“만성골수성 백혈병 조기증상 사례”논문을 발표했다. 원폭이 투하되고 17년이 지나 나나오씨의 “피폭자와 함께 걷는 삶”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6일 8시15분

폭심지에서 500m 이내에 있던 한 초등학교에서
우연히 지하실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8살 소년

원폭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한 후 고아수용소로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 결혼하고 마침내 행복을 잡았지만
위암을 앓고 두 번의 수술 경험
첫 손주를 백혈병으로 잃고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여
오랫동안 자기 아이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원폭 방사선과 관련된 간질성 폐렴을 앓고,
호흡을 할 때마다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염색체 이상률은 21%

피폭된 지 60여년이 지난 어느 해가 끝날 무렵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핵무기는,
피폭된 인간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평생 학대를 합니다.

 

 

 

위의 글은 나나오 의사가 오랫동안 교류했던 근거리 피폭자 중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이다.
즉사할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지만 그 몸과 마음, 생활 실태는 크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피폭 후 70년간 추적조사를 하는 동안에 66명이 죽었다. “사망한 분의 약 50%가 암에 걸렸습니다. 원폭 투하 시에 쬔 방사선으로 한 순간에 각 장기의 줄기세포 DNA가 손상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암세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마다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기를 달리해 암이 발병하는데 전이가 아니라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암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간을 유전자 레벨로 손상시키고 평생동안 그 인생을 손상시킨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1945년 8월 6일 8시15분

폭심지에서 500m 이내에 있던 한 초등학교에서
우연히 지하실에 있다가
목숨을 건진 8살 소년

원폭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한 후 고아수용소로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 결혼하고 마침내 행복을 잡았지만
위암을 앓고 두 번의 수술 경험
첫 손주를 백혈병으로 잃고
아들은 아버지를 걱정하여
오랫동안 자기 아이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원폭 방사선과 관련된 간질성 폐렴을 앓고,
호흡을 할 때마다 호흡곤란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염색체 이상률은 21%

피폭된 지 60여년이 지난 어느 해가 끝날 무렵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핵무기는,
피폭된 인간을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모든 면에서
평생 학대를 합니다.

 

위의 글은 나나오 의사가 오랫동안 교류했던 근거리 피폭자 중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이다.
즉사할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지만 그 몸과 마음, 생활 실태는 크게 갉아 먹히고 있었다. 피폭 후 70년간 추적조사를 하는 동안에 66명이 죽었다. “사망한 분의 약 50%가 암에 걸렸습니다. 원폭 투하 시에 쬔 방사선으로 한 순간에 각 장기의 줄기세포 DNA가 손상되었고, 그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암세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마다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기를 달리해 암이 발병하는데 전이가 아니라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암이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간을 유전자 레벨로 손상시키고 평생동안 그 인생을 손상시킨다.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피폭자와 함께 걸어온 연구자의 삶

1967년(29세)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사진1)
1970년(33세)영어논문“골수성 세포 염색체에 미치는 방사선의 영향”을 나가사키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취득
1972년(35세)폭심지에서 반경 500m이내의 피폭생존자에 대한 조사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프로젝트”를 담당하다

(사진1)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 임상병리학 부서에서 연구자으로서 배움을 깊이했다

1978년(41세)영어논문을 국제혈액학회 등에서 발표, 세계적인 교과서 ‘Wintrobe 임상혈액학’에 게재되다
1982년(45세)‘원폭후장애연구회’에서 거듭된 보고로 히로시마현 의사회로부터 ‘히로시마 의학상’을 받다. 프로젝트팀 11명 대표로 수상
1985년(48세)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혈액학 연구부문 교수로 취임(사진2)
1988년(51세)IPPNW(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의)일본지부 이사로 취임
1991년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발족
1997~99년
(60세~62세)
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회장
2000년(63세)이바라기현 도카이촌을 방문해 임계피폭 사고조사와 지원을 하다(사진3)
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퇴직
1967년(29세)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사진1)
1970년(33세)영어논문“골수성 세포 염색체에 미치는 방사선의 영향”을 나가사키대학에 제출하여 박사학위 취득
1972년(35세)폭심지에서 반경 500m이내의 피폭생존자에 대한 조사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프로젝트”를 담당하다

 

1978년(41세)영어논문을 국제혈액학회 등에서 발표, 세계적인 교과서 ‘Wintrobe 임상혈액학’에 게재되다
1982년(45세)‘원폭후장애연구회’에서 거듭된 보고로 히로시마현 의사회로부터 ‘히로시마 의학상’을 받다. 프로젝트팀 11명 대표로 수상
1985년(48세)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혈액학 연구부문 교수로 취임(사진2)
1988년(51세)IPPNW(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의)일본지부 이사로 취임
1991년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발족
1997~99년
(60세~62세)
방사선 피폭자 의료국제협력추진협의회(HICARE)회장
2000년(63세)이바라기현 도카이촌을 방문해 임계피폭 사고조사와 지원을 하다(사진3)
히로시마대학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퇴직

(사진1)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 임상병리학 부서에서 연구자으로서 배움을 깊이했다

(사진2) 교수취임을 축하하며. 앞줄 가운데가 본인

(사진2) 교수취임을 축하하며. 앞줄 가운데가 본인

(사진3)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 의료팀 일원으로서 이바라기현 도카이촌 핵연료가공회사 JCO에서 임계피폭 사고 조사와 지원

생애의 테마 “폭심지에서 반경500m 근거리 피폭자의 의학적 연구”

원폭 방사능 의학연구소와 히로시마시, NHK와의 공동연구로 발견된 폭심지에서 반경 500m 이내에 있던 피폭생존자 78명. 그 의학적 추적조사를 맡게 된 나나오 의사는 정기적인 건강검진, 염색체 이상률에서 나오는 피폭선량 측정, 혈청∙세포 레벨에서 방사선에 기인하는 이상성, 유전자 이상 등을 검출했다. 피폭자 분들과의 대화를 중시하고 무심코 내뱉는 말과 호소 속에서도 힌트를 찾았다. “두통이 있다는 분이 몇 사람 있어서 마음에 걸려 CT 촬영한 결과, 수막종이 발견되었어요. 이것은 꽤 드문 질병이에요. 검사를 거듭한 결과, 폭심지에서 1km이내에 있던 피폭자에게 수막종이 높은 비율로 발병하는 것이 판명된 거에요”

2017년에는 강연회도 열었다

  

근거리 피폭자 추적조사에서 얻은 지견

  • 가족붕괴∙가족형성장애(미혼,이혼,외톨이 노인) (1975)
  • 염색체 이상(악성화 소지)(1975)
  • 건강한 피폭자에 나타나는 암 유전자의 변화 (1990)
  • 두번째, 세번째의 암 발병 (2004)
  • 정신적인 면에서 해마다 불안 증강 (2006)
  • 원폭은 ‘평생 학대’상황을 만들어낸다 (2018)

※( )안은 발표 연도

  

“연구에 의해서 의학계 일반에 공헌하는 새로운 근거를 다수 밝혀냈다. 모든 것은 피폭자가 몸소 나타내고 이끌어 준 것입니다”골수천자, 피부생검, 거듭되는 혈액 채취…아픈 경험을 하게 되는 검사에 오랜 세월 동안 협력해 주신 피폭자분들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의에서 나나오 의사는 히로시마 대학을 퇴직하고 나서도, 자비와 휴일을 충당해 정기적인 건강 진단과 대화를 거듭했다. 전화와 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출장지에서는 선물을 보낸다. 잠시도 그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말을 걸 때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먼저 이야기를 듣는다.‘의사로서’이전에, ‘사람으로서’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나나오 의사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말을 걸 때는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고 먼저 이야기를 듣는다.‘의사로서’이전에, ‘사람으로서’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나나오 의사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그때까지의 나는,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서 피폭된 사람,
고선량을 쬔 피폭자를 진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원폭 요양원에서 만난
다양한 피폭 체험을 거친 입소자 여러분들이
제가 보고 있던 세상을
크게 펼쳐줬어요.

 

 

 

 

그때까지의 나는,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서 피폭된 사람,
고선량을 쬔 피폭자를 진찰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원폭 요양원에서 만난
다양한 피폭 체험을 거친 입소자 여러분들이
제가 보고 있던 세상을
크게 펼쳐줬어요.

 

 

  • Story.3
    Nanao Kamada

2000년 의사이며 연구자로서 지내온 히로시마대학에서의 38년간을 마치고, 일반 병원에서의 직을 거쳐 2001년부터 공익 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으로 변신. 보수는 크게 줄었지만 나나오 의사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피폭자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피폭자의 시선, 공정 원칙, 성실한 대응’이라고 스스로 행동훈령을 정하고 현장에 나가길 원했다. 입소자와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요양원 내부의 작은 변화나 문제점을 알기 위해 주춤하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이사장실을 나와 시설 내부를 돌아다녔다. 입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1년에 25번의 행사를 기획. 입소자의 고령화에 따라 침대에서 지내는 사람도 증가했기 때문에 홀에서의 행사를 거실에서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의 배선 공사를 하고 모두가 같은 화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궁리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그 수는 194명. “피폭자 분들이 안심하고 마음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그 서포트 역할을 하는 직원을 당연히 소중히 여겨야 하죠”. 직원들의 능력과 의욕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연수를 하면서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히로시마현으로부터 위루·객담흡인 연수 교육시설로서 인정을 받아 많은 자격 취득자를 배출하였다. 또 이른 시기부터 병구완을 도입해 요양원 전체에서 고령화된 피폭자에게 존엄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간병·간호에 힘썼다. 망년회에서는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직원을 표창하고 나나오 의사가 직접 만든 기념사진이 담긴 앨범을 증정하고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유머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활동과 학술 발표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원폭투하 후 2주내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가 피폭되거나 내부피폭, 피폭 2세를 깊이 연구한 것도, 다양한 형태의 피폭을 경험한 노조미엔의 입소자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끼쳤다.

노조미엔에서 보낸 16년 동안 나나오 의사의 매일은 아침 5:30 기상, 8:30부터 20:30까지 근무, 23:30 취침. 원폭 양호홈이라고 하는 특별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또 연구자로서, 높은 이상을 내걸고 온 힘을 다했다.“대학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못지않은 알찬 시간이었죠”
그 에너지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 Story.3
    Nanao Kamada

2000년 의사이며 연구자로서 지내온 히로시마대학에서의 38년간을 마치고, 일반 병원에서의 직을 거쳐 2001년부터 공익 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으로 변신. 보수는 크게 줄었지만 나나오 의사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피폭자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안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피폭자의 시선, 공정 원칙, 성실한 대응’이라고 스스로 행동훈령을 정하고 현장에 나가길 원했다. 입소자와 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요양원 내부의 작은 변화나 문제점을 알기 위해 주춤하는 직원들을 설득해서 이사장실을 나와 시설 내부를 돌아다녔다. 입소자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1년에 25번의 행사를 기획. 입소자의 고령화에 따라 침대에서 지내는 사람도 증가했기 때문에 홀에서의 행사를 거실에서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의 배선 공사를 하고 모두가 같은 화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궁리했다.

그리고 모든 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그 수는 194명. “피폭자 분들이 안심하고 마음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그 서포트 역할을 하는 직원을 당연히 소중히 여겨야 하죠”. 직원들의 능력과 의욕향상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직원연수를 하면서 방사선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히로시마현으로부터 위루·객담흡인 연수 교육시설로서 인정을 받아 많은 자격 취득자를 배출하였다. 또 이른 시기부터 병구완을 도입해 요양원 전체에서 고령화된 피폭자에게 존엄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간병·간호에 힘썼다. 망년회에서는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직원을 표창하고 나나오 의사가 직접 만든 기념사진이 담긴 앨범을 증정하고 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유머도 잊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활동과 학술 발표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원폭투하 후 2주내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가 피폭되거나 내부피폭, 피폭 2세를 깊이 연구한 것도, 다양한 형태의 피폭을 경험한 노조미엔의 입소자와의 만남이 큰 영향을 끼쳤다.

노조미엔에서 보낸 16년 동안 나나오 의사의 매일은 아침 5:30 기상, 8:30부터 20:30까지 근무, 23:30 취침. 원폭 양호홈이라고 하는 특별한 직장의 책임자로서, 또 연구자로서, 높은 이상을 내걸고 온 힘을 다했다.“대학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시절 못지않은 알찬 시간이었죠”
그 에너지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히로시마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히로시마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

2001년(64세)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 피폭자 원호사업단 이사장,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원장 취임 (사진1)
2002년(65세)나가이 다카시 평화기념·나가사키상 수상 (사진2)
2005년(68세)‘히로시마의 할머니’출판 (사진3)
2006년(69세)원폭 후 장애연구회에서 ‘ 입시 피폭자 백혈병’에 대해 발표
2007년(70세)PTSD 심포지엄(이탈리아)에 참가·보고
2008년(71세)IPPNW(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의) 세계대회(인도)에서 발표
2011년동일본 대지진이 발생
후쿠시마현에 가서 피폭 조사를 하다(사진4)
2012년(75세)‘후쿠시마 내부피폭선량’에 대해 발표
IPPNW 세계대회(일본)에 참가·발표
2015년(78세)세계핵피해자포럼(히로시마)을 운영, 동 보고서 감수(사진5)
2016년(79세)‘폐암 조직에서 증명된 내부피폭’에 대해 발표
2017년(80세)재단법인 히로시마 원폭피폭자 원호사업단 및 히로시마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 퇴직
히로시마대학 객원교수 취임
의료법인 닌코회 혼고추오병원 검진센터장 취임
2018년(81세)서일본 호우재해를 계기로 상기 병원에서 퇴직
히로시마 원폭장애대책 협의회(건강 관리·증진 센터)
비상근 근무

 

(写真1)

▲(사진1) 원폭 양호홈 구라카케 노조미엔은 그 특성상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다. 평화 학습으로
방문하는 초·중학생, 수련의와 간병 실습생, 황족과 당시의 총리 등.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도 많은 직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입소자의 행복과 직원들의 보람을 중시하는 운영에 고심했다

 

▼(사진2) 나가이 다카시박사는 은사인 도모나가 교수가 주치의로서 마지막까지 꼭 붙어서 돌본 환자였다. 감회가 깊은 수상

(写真2)

▶(사진3) 노조미엔에서 직원 연수를 위해 준비한 텍스트를 책으로 재편집해서 평화교육 교재로 자비 출판. 그 매상은 모두 사업단에 기부할 것을 공약하고 실행. 그 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을 작성하여 IPPNW 보스턴 본부의 웹 사이트에서 전문을 열람하고 다운로드 가능하게 하여 히로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사진3) 노조미엔에서 직원 연수를 위해 준비한 텍스트를 책으로 재편집해서 평화교육 교재로 자비 출판. 그 매상은 모두 사업단에 기부할 것을 공약하고 실행. 그 후,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을 작성하여 IPPNW 보스턴 본부의 웹 사이트에서 전문을 열람하고 다운로드 가능하게 하여 히로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발신하고 있다.

(写真3)

 

▼(사진4) 2011년 5월, 원의연 출신으로 후쿠시마시에 거주하고 있는 의사, 사이토 오사무 의사와 함께 독자적으로 조사.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와 가와마타쵸 주민으로부터 채뇨와 함께 2개월간의 행동을 청취하고 쪼인 방사선량을 개인별로 추정해 발표(2012년).

(写真4)
(写真5)

(사진5) 세계 핵피해자 포럼(2015년 히로시마) 운영

학술발표 ※( ) 안은 발표연도

직접피해자 연구
  • 백혈병 소지가 되는 피폭자 골수세포에 염색체 이상이 오래 지속되는 것(1969)
  • 염색체 이상으로 피폭된 선량을 추정할 수 있을 것
  • 건강한 고선량 피폭자에게 타인의 염색체 이상을 유발하는 인자(혈청인자)가 있는 것(1978)
  • 반치사선량(사람 반쯤이 30일 이내에 사망하는 방사선량)은 3.5-4Sv인 것(1989)
  • 건강한 피폭자 골수세포 DNA에 암 유전자(RAS) 변이가 있는 것(1988)
  • 사춘기에 피폭된 사람의 유방암 다발(1989), 뇌종양 다발(1997)을 새로운 사실로 보고
병행해서 혈액전문분야에서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전과정 규명(1978), 8;21전좌형 백혈병 존재 최초 발표(1968, 1976), 4개의 백혈병 전좌형 유전자 배열 규명 등
입시피폭자 연구1970-1990년 사이에 입시 피폭자로부터 발생한 백혈병 환자 113명을 해석. 8월 6일과 7일에 폭심지에서 약 2km 이내에 들어간 피폭자에게 백혈병 발병률이 전국의 발병률과 비교하여 3.4배 높다는 사실을 발표(2006)
피폭2세 연구원의연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피폭 2세를 해석. 119,311명을 동정. 현내 피폭 2세 수는 13만~13만5천명으로 추정(2010), 그 중에 94명의 백혈병 발병자를 확인하고 부모 양쪽이 피폭된 경우는 한쪽만 피폭된 경우보다 발병 빈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표(2012)하고 부모가 피폭하고나서 약 10년 이내에 태어난 2세에게 발병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보고(2014)
내부피폭 연구폭심지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서 직접 방사선을 쬐지 않았더라도‘검은 비’가 내린 지역에서 오염된 빗물과 야채를 먹은 사람에게 피폭 50년 후부터 폐암, 위암, 대장암, 혈액병을 앓은 사례를 보고(2008) 그 사람의 폐암조직에서 우라늄 붕괴로 보이는 방사선 비적을 유제감광법으로 증명(2016)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리는,
세상에 두 곳밖에 없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지요.

핵무기의 비인도적 파괴를 체험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리는,
세상에 두 곳밖에 없어요.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지요.

핵무기의 비인도적 파괴를 체험한 사람들은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해 나가야 합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