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오카 세이고

 

히로시마, 얼굴

니시오카 세이고

 

 

1945년 8월 6일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오전 8시 15분
한 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거리에 떨어졌다.

그날, 건물소개 하러 나간
내 동급생 192명은
모두 사망했다.

나카지마신마치, 폭심지에서 약 600미터.

뜨거운 열기에 그을리고 폭발에 날아가고,
얼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45년 8월 6일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오전 8시 15분
한 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거리에 떨어졌다.

그날, 건물소개 하러 나간
내 동급생 192명은
모두 사망했다.

나카지마신마치, 폭심지에서 약 600미터.

뜨거운 열기에 그을리고 폭발에 날아가고,
얼굴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Profile

니시오카 세이고

1931년(쇼와 6년) 10월 25일, 오사카시 미나토구에서 태어난 후, 히로시마시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한다.

부모님과 형이 둘인 다섯 식구로 3형제 중 막내. 전쟁 중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1945년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현재, 현립 히로시마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6일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카지마신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600m)의 건물소개 작업을 하루 쉬고, 센다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2km)에 있는 학교 내 작업에 나섰다. 그게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줄도 모르고. 교문을 들어섰을 때, B29의 폭음이 희미하게 들려서“경보가 해제되었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건물소개하러 나간 동급생은 전원 사망. 니시오카씨 자신도 얼굴과 몸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했다. 처음에는 고료중학교 수용소, 8월 9일에는 사카무라 수용소로 이동하고 8월 15일에 아버지의 고향인 이쿠치지마에 있는 친척집에 도착했다.“얼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나오고 구더기가 기어 나와 주변 사람이 나를 피했어요”가족과 친척들은 1학년 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니시오카씨를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척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서서히 회복하여 외갓집에 의탁해 생활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했다. 사회에 나가서는 설계 업무, 발전소 업무에 종사하며 35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는 가운데 결혼하여 두 자녀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자신의 피폭 체험을‘13살 소년의 원폭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종이연극을 제작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기증하고, 2019년 리뉴얼 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동관에 니시오카씨가 피폭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과 함께 전시되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다섯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원폭투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친구들과 히로시마 시민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의 전쟁과 피폭 체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활동을 착실하게 계속하고 있다.

Profile

니시오카 세이고

1931년(쇼와 6년) 10월 25일, 오사카시 미나토구에서 태어난 후, 히로시마시 니시하쿠시마쵸로 이사한다.

부모님과 형이 둘인 다섯 식구로 3형제 중 막내. 전쟁 중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1945년 히로시마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현재, 현립 히로시마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8월 6일은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나카지마신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600m)의 건물소개 작업을 하루 쉬고, 센다마치(히로시마시 나카구, 폭심지에서 약 2km)에 있는 학교 내 작업에 나섰다. 그게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줄도 모르고. 교문을 들어섰을 때, B29의 폭음이 희미하게 들려서“경보가 해제되었는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다. 건물소개하러 나간 동급생은 전원 사망. 니시오카씨 자신도 얼굴과 몸에 화상을 입고 부상을 당했다. 처음에는 고료중학교 수용소, 8월 9일에는 사카무라 수용소로 이동하고 8월 15일에 아버지의 고향인 이쿠치지마에 있는 친척집에 도착했다.“얼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나오고 구더기가 기어 나와 주변 사람이 나를 피했어요”가족과 친척들은 1학년 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니시오카씨를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친척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서서히 회복하여 외갓집에 의탁해 생활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했다. 사회에 나가서는 설계 업무, 발전소 업무에 종사하며 35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는 가운데 결혼하여 두 자녀를 갖게 된다. 지금까지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등 다양한 질병을 앓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자신의 피폭 체험을‘13살 소년의 원폭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종이연극을 제작하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기증하고, 2019년 리뉴얼 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동관에 니시오카씨가 피폭 당시에 입고 있었던 옷과 함께 전시되었다. 두 아들과 며느리, 다섯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원폭투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친구들과 히로시마 시민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자신의 전쟁과 피폭 체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활동을 착실하게 계속하고 있다.

한 장의 추억

전후, 히로시마역 앞 암시장에 생긴 아라카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한 장.
당시에는 사진촬영이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작은 사진이라도 기뻤다”.
1946년 2월경 촬영

 

 

 

 

푸른 하늘에
한 가닥의 비행운…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B29가 생각나서
지금도 무서워요.

 

1945년 4월 8일, 니시오카씨는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에 입학했다. 긴장하면서도 희망에 찬 입학식을 마치고 신입생들만 수업을 받고 상급생들은 모두 학도동원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학년도 동원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고구마밭 개간, 방공호 토사운반, 건물소개 등 12살13살 어린이가 더위와 배고픔과 맞서 싸우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으며 중노동에 종사했던 것이다.

8월 6일. 니시오카씨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아 건물소개하러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교 교내 작업에 나섰다. 8시 15분. 건물소개 현장인 나카지마신마치는 폭심지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작업에 나섰던 동급생들은 단 한 발의 원폭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 되어 모두 숨졌다. 우연히 건물소개하러 나가지 않아서 목숨을 건진 니시오카씨의 가슴에는 항상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없이 비명횡사한 동급생들의 모습이 있다.

 

푸른 하늘에
한 가닥의 비행운…

예쁘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B29가 생각나서
지금도 무서워요.

 

1945년 4월 8일, 니시오카씨는 현립 히로시마공업학교에 입학했다. 긴장하면서도 희망에 찬 입학식을 마치고 신입생들만 수업을 받고 상급생들은 모두 학도동원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학년도 동원작업에 나가게 되었다. 고구마밭 개간, 방공호 토사운반, 건물소개 등 12살13살 어린이가 더위와 배고픔과 맞서 싸우면서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으며 중노동에 종사했던 것이다.

8월 6일. 니시오카씨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아 건물소개하러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교 교내 작업에 나섰다. 8시 15분. 건물소개 현장인 나카지마신마치는 폭심지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작업에 나섰던 동급생들은 단 한 발의 원폭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 되어 모두 숨졌다. 우연히 건물소개하러 나가지 않아서 목숨을 건진 니시오카씨의 가슴에는 항상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없이 비명횡사한 동급생들의 모습이 있다.

 

 

가장 친한 친구
이토 이즈오군을 생각하며

중학교 동급생인 이토 이즈오씨
국립 히로시마 원폭사몰자 추모평화기념관 제공

원폭이 투하되고 4개월 후인 1945년 12월, 니시오카씨는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여 동급생들이 죽어간 건물소개 현장을 방문했다.
‘이토! 이토!’라고 친구 이름을 외쳐도 대답이 없었다. 하모니카를 잘 부르고 등대지기였던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토 이즈오군. 입학하고 4개월 동안 매일같이 함께 놀았던 가장 친한 친구는 원자폭탄 한 발에 희생되어 가족과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손녀가 그린 원폭의 참상

‘항구의 배 사이로 떠다니는 시신’
2010년도 제작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소장)
피폭체험 증언자 / 가사오카 사다에씨
제작자 / 니시오카 유카씨 (63회생)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 고교의 창조표현 코스의 학생들은 피폭자 분들로부터 피폭 체험과 피폭 참상을 듣고 그림으로 그려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 당시, 멤버 중에는 니시오카씨의 손녀도 있었다. 유카씨는 피폭자 분들의 아픈 과거에 대한 생각을 끌어내서 “이런 참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전쟁체험을
종이연극으로 남기다

기억하기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전쟁 그리고 피폭의 기억. 자신 안에 봉인해 둔 추억을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니시오카씨는 글로 기록했다. 종이연극‘13살 소년의 원폭체험’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철 게이비선 야가역 근처의 산에 파여 있던 방공호.

니시오카씨와 다른 중학생들은 2인 1조로 삼태기를 메고 토사를 운반했다

국철 게이비선 야가역 근처의 산에 파여 있던 방공호.
니시오카씨와 다른 중학생들은 2인 1조로 삼태기를 메고 토사를 운반했다

더위에 시큼해진 도시락도 쌀 한 톨 남김없이 먹고,

얼굴에 땀과 먼지로 검은 줄이 생길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열심히 건물소개 작업에 종사했다

더위에 시큼해진 도시락도 쌀 한 톨 남김없이 먹고,
얼굴에 땀과 먼지로 검은 줄이 생길 정도로 뒤범벅이 되어 열심히 건물소개 작업에 종사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된
화필의 힘

1967년에서 69년 사이에 폴란드 장기 출장을 세 차례 경험한 니시오카씨. 잊을 수 없는 현지에서의 만남과 추억과 함께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을 때 본 그림이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어. 그림은 말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이것을 계기로 니시오카씨는 자신의 피폭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소박한 터치 속에 리얼리티가 담긴 작품은 당시에 대해 상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니시오카씨만이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이다.

 

 

 

 

지금까지 4번이나 구급차 신세를 지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의사가 말했다.
“피폭과의 관련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피폭자에게 이런 내장질환이 많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피폭자는 의료비가 공짜라서 곧바로 병원에 간다”고.

내 사촌은 건강관리수당 을 수급하고 있었지만
이웃한테‘세금 도둑’이라는 험담을 듣고 수급을 취소했다.

피폭자는 스스로 피폭한 것이 아니다.

 

원폭이 투하된 순간에는 니시오카 소년이 마침 교문을 들어서서 어진 에게 최고 경례를 했을 때였다.‘앗 뜨거! 뜨거!’ 라고 외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했다. 그 때 폭풍이 불며 날아가 버렸다. 눈과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려 있는데 물건이 펑펑 날아오고 기와가 비 오듯 떨어졌다. 다리가 대들보 같은 것에 끼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얼굴과 손이 순식간에 물집이 잡혔고 왼쪽 다리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학교는 폭심지에서 약 2킬로 떨어진 센다마치였다. 원폭은 니시오카씨의 몸 표면뿐만 아니라 몸속도 좀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4번이나 구급차 신세를 지고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했다.
급성 췌장염, 간부전, 담낭염, 장폐색.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의사가 말했다.
“피폭과의 관련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피폭자에게 이런 내장질환이 많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피폭자는 의료비가 공짜라서
곧바로 병원에 간다”고.

내 사촌은 건강관리수당
수급하고 있었지만
이웃한테 ‘세금 도둑’이라는 험담을 듣고
수급을 취소했다.

피폭자는 스스로 피폭한 것이 아니다.

 

원폭이 투하된 순간에는 니시오카 소년이 마침 교문을 들어서서 어진 에게 최고 경례를 했을 때였다. ‘앗 뜨거! 뜨거!’ 라고 외치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했다. 그 때 폭풍이 불며 날아가 버렸다. 눈과 귀를 막고 땅에 엎드려 있는데 물건이 펑펑 날아오고 기와가 비 오듯 떨어졌다. 다리가 대들보 같은 것에 끼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구조되었지만 얼굴과 손이 순식간에 물집이 잡혔고 왼쪽 다리는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학교는 폭심지에서 약 2킬로 떨어진 센다마치였다. 원폭은 니시오카씨의 몸 표면뿐만 아니라 몸속도 좀먹고 있었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

그 근원은 같다.

히로시마를 경험하고 피폭된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그날까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발전소에 근무했던 니시오카씨는 히로시마 시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고 안심할 수도 있고 비용이 매우 싸다. 앞으로 일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니시오카씨는 그 강연을 떠올렸다. “그 무렵, 모든 사람이 원전은 훌륭하다고 믿고 있었다. 왜 핵의 무서움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제와서‘원자력 발전’과‘원폭’의 근원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

그 근원은 같다.

히로시마를 경험하고 피폭된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2011년 3월 11일 그날까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발전소에 근무했던 니시오카씨는 히로시마 시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내용은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고 안심할 수도 있고 비용이 매우 싸다. 앞으로 일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니시오카씨는 그 강연을 떠올렸다. “그 무렵, 모든 사람이 원전은 훌륭하다고 믿고 있었다. 왜 핵의 무서움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제와서‘원자력 발전’과‘원폭’의 근원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