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에미코

 

히로시마, 얼굴

오카다 에미코

 

 

12살이었던 언니는
그날 아침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나서 집을 나섰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는
집을 나간 채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상상해 보렴

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는다고.

12살이었던 언니는
그날 아침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나서 집을 나섰어.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밝게 인사하고는
집을 나간 채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상상해 보렴

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는다고.

 

Profile

오카다 에미코 (결혼 전 이름: 나카사코 에미코)

1937년(쇼와 12년) 1월 1일, 히로시마시 히가시구 오나가초에서 태어나다.

아버지, 어머니, 4 살 위 언니, 3 살과 5 살인 어린 남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였다.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여덟 살에 원자폭탄에 노출. 당시 12살이던 언니는 그날 건물소개(방화지대를 마련하기 위해 건물을 강제철거하는 일)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에미코씨는 히지야마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양재학교로.

전쟁 중에 마츠모토 공업고등학교(현 세토우치 고등학교)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딸을 잃은 괴로움과 더불어 군사교육을 했던 사람이 민주주의 교육으로 전향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퇴직. 공구점을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 도산. 부모님은 도쿄에 있는 아들을 의지하여 상경, 히로시마에는 에미코씨만 남는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양재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살려 양장점을 개업. 매일 생업에 쫓기는 와중에 결혼하고 미친듯이 생활한다. 그 후, 생계가 안정되고 두 아이를 갖게 되지만, 중학교 1학년이 된 장남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그 깊은 슬픔을 계기로 패션 일에서 물러난다.

1987년 50세 때 아메리카에서 평화를 위해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세계우정센터(WFC)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고 응모. 피폭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행이 결정되고 일본문화를 소개하게 됨. 아메리카에서 바바라 레이놀즈와 만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평화활동에 눈뜨게 되고, 히로시마의 원자폭탄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오키나와전투, 난징대학살,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지뢰 등에 대해서도 자주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다.

1999년부터 히로시마평화자원봉사활동 개시, 히로시마평화문화센터에서 원자폭탄피해 체험 증언 시작.
2001년, 우크라이나 키우이에서 원자폭탄피해 증언. 원자력발전소 사고 피해자와 만나다.
2005년, 원자폭탄피해 60주년 프로젝트 ‘히로시마 세계평화사절단’ 의 일원으로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건너가다.
2007년, 전미원자폭탄전람회에서 원자폭탄피해에 대해 증언하다.
2009년, 손주와 함께 뉴욕으로 건너가 유엔본부에서 원자폭탄피해에 대해 증언하다.
영화 ‘아토믹 맘’에 출연.
근래에는 히바쿠샤(원폭피해자) 국제서명과 핵무기금지조약채택을 위한 긴급행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2021년4월, WFC 모임 참가 중 서거. 향년 82세.

 

 

가족사진 1

사진 왼쪽부터 언니, 미에코씨, 남동생, 어머니, 뒤는 아버지

 

에미코씨의 언니인 나카사코 미에코씨는 1945년 당시 12살이었다. 히로시마 제일현립여 의 학생으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커튼 뒤에 숨어서 비밀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저 평범하고 사이 좋은 자매였어” 언니는 8월 6일 아침에 건물소개 하러 나간 채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도하시 는 건물소개를 위해 모이는 집합장소였어요. 거기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언니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전혀 몰라요. 혼자서 갈팡질팡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았기를 기도해요.”

언니의 편지

부모님은 언니인 미에코씨의 행방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어딘가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엄마는 당시에 임신 중이었는데 유산을 했지. 부모님은 언니의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공양탑에 언니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아” 건물소개로 동원되어 한 발의 원자폭탄에 불타 죽어간 어린이들. 그 수는 약 6,000명이라고 한다. “생각해 봐. 12살, 13살 정도라고 하면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그 아이들이 썼던 모자, 제복, 단추, 학교 휘장···. 자료관 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 아니야. 모두 유품.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돼” 에미코씨 수중에는 언니 미에코씨가 쓴 편지가 남아 있다. “언니가 출정하는 사촌 앞으로 쓴 편지가 되돌아 왔어. 언니의 유품은 이것뿐이에요. 유골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거든”

“나는 말야, 지금도 현관 열쇠를 열어둔 채로 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언니 잘 다녀왔어?’ 하고 말하고 싶어서”

 

 

 

 

 

 

8 살에 원자폭탄 방사능에 노출되었잖아요.

그리고 12년이 지나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던거야.

“원자폭탄이란 게 뭐지?”
“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거지?”

그때까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8 살에 원자폭탄 방사능에 노출되었잖아요.

그리고 12년이 지나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던거야.

“원자폭탄이란 게 뭐지?”
“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거지?”

그때까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

피폭 후, 에미코씨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잇몸에서 피가 나고 머리카락이 빠졌어.
피곤해서 자주 누웠지.
당시에는 방사선 피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던 거야”
20 살 때,
처음 진단받은 재생불량성 빈혈,
피폭자 대부분에게서 이 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건강불안은 피폭 2세에도 미친다.

 

 

가족 사진 2

에미코씨는 24살에 결혼해서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를 갖게 되었다.
전후 어려운 시절에 양재기술을 살려서 계속 일한 보람이 있어 백화점에 점포를 열 수 있었다.
“아이들이 크면 패션 빌딩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어요” 그러나 어느 날 그 꿈을 산산조각 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장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불단 앞에 앉아서 술에 젖을 정도로 마셨어. 일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서 말야” 패션계를 떠난 에미코씨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이들의 七五三기념으로. 아들, 딸과 에미코씨

 

평화활동에 대한 각성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세계우정센터 창시자인 바바라 레이놀즈씨. 중앙이 에미코씨.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패션 업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에미코씨는, 어느 날 신문을 읽다가 마음에 걸리는 기사를 보게 된다. “당신은 세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세계우정센터 가 아메리카에서 평화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이었어. 세계 평화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이력서에 기재한 특기 ‘일본무용, 다도, 꽃꽂이’ 가 담당자의 눈에 띄어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87년, 오카다 에미코 50살에 도미. 이것이 평화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피폭체험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돌아오는 말이 “진주만이 먼저다” 거기에서 오카다씨는 원자폭탄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히로시마의 피폭자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피폭체험과
ヒロシマ(히로시마)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해서
끝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세상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히로시마의 피폭자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피폭체험과
ヒロシマ(히로시마)의 비참한 체험만을 이야기해서
끝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세상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피폭 증언을

자료를 손에 들고 피폭증언을 하는 에미코씨

2000년 에미코씨는 쥬노회 의 가이 히토시씨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방문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희생자들 앞에서 히로시마 피폭자를 대표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집회소와 같은 장소에는 원전사고로 사망한 어린이들의 사진이 다수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키이우는 원전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10km가까이 떨어져 있지만, 인근 초등학교에서는 그 당시의 재학생 대부분이 갑상선암에 걸렸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희생되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야” 언니와 아들을 잃은 오카타씨의 아픈 과거는 전 세계의 아이들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방사능에 의한 피해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된 히로시마와 우크라이나. 원폭피해자인 에미코씨가 원폭의 참상을 딛고 키이우를 방문한 것, 그 자체가 키이우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첫 손주와 함께 유엔으로

2009년에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회의에 첫 손주와 함께 참석. 각국의 시장들 앞에서 두 사람이 각각 연설을 하였다.
“각국의 시장님이 손주에게 말을 걸어 주셨어요. 평화라는 게 이런 거라고”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박수. 무릎을 맞대고 대화하는 가운데 평화가 태어난다. 그것을 체감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에미코씨는 피폭 증언장에 설 때도 자신의 피폭체험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게 아닌, 세계에서 보고 온 것, 핵무기를 둘러싼 세계의 상황도 담아 글로벌한 시야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자세를 고수했다.

 

 

 

 

 

오바마씨가 히로시마에 왔을 때, 기자가 물었어.
“사죄하길 바라세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오바마씨가 사죄해서 언니가 돌아온다면 사죄하기를 바라죠” 라고.

언니는 돌아오지 않잖아요.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렇지만 미래는 앞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2016년 5월 27일, 제44대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씨가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원자폭탄을 투하한 아메리카 현직 대통령이
피폭지를 방문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편집・제작 NPO법인ANT-Hiroshima

사진 이시코 마리

글 고토 미카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