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눈이
폐가
피가
몸 여기저기가
나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히바쿠샤(원폭 피해자)입니다” 라고.
나는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눈이
폐가
피가
몸 여기저기가
나에게 호소합니다.
“당신은 히바쿠샤(원폭 피해자)입니다” 라고.
-
Story.1
Keiko Shimizu
시미즈 게이코 (결혼 전 이름・아키모토 게이코)
1943년(쇼와18년) 12월 23일 히로시마시 기리노키쵸(현재 미나미구)에서 태어난다.
1945년 3월 가모군 조가무라(현재 히가시히로시마시)의 친척집으로 피난. 아버지는 출정하여 부재중이었고 어머니는 임신중이었다.
1945년 8월 6일 어머니는 1년 7개월된 게이코씨를 등에 업고 빨래를 널고 있었다.
8시 15분 어머니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콰앙’하는 공기압과 같은 것을 느끼고 무심결에 자신과 딸의 머리에 세탁물을 씌워서 엎드렸다고 한다. 그것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마을에는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왔다. 마을사람이 총출동하여 간호하고 몸이 무거웠던 어머니도 그 일원으로서 함께 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졌고 그 당시에 어렸던 게이코씨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구마노(아키군 구마노쵸)에 있는 친척집에 맡길 생각으로 게이코씨를 데리고 히로시마역 주변을 방문한다. 결국 많은 친척들이 구마노 친척집에 의탁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구마노에는 맡길 수 없었지만, 이때 게이코씨가 방사능에 노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살이 지났을 무렵부터 눈 상태가 나빠져 사시가 된다. 1946년 봄 무렵에는 할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단바라(히로시마시 미나미구) 집으로 이사해 친척도 함께 지내는 큰 살림살이가 된다.
그 후, 잇몸출혈로 식사를 할 수 없게 되고 초등학생 때는 폐결핵과 늑막염을 앓아 장기 결석한 적도 있었다. 엄청난 코피를 쏟거나 설사와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인 다케시씨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사진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방문한 미야지마에서. 앞 줄 오른쪽 끝이 게이코씨
피난처인 조가무라에서 피폭자 구호에 종사한 어머니, 그 당시에 어머니 뱃속에 있던 남동생.
원폭투하 후에 히로시마에 발을 디딘 어린 게이코씨.
세 사람은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각각 다양한 고통을 짊어졌다.
웃는 얼굴이 귀여웠던 남동생이 그 후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954년 촬영.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맨 왼쪽이 게이코씨.
병을 앓아 몸은 약했지만,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시절
감성을 키운 어린시절
전쟁이 끝나고 10년 후인 1955년12월23일, 12살 생일에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당시에는 매주 오페레타 연습하러 다니고 있었다.
노래하기를 아주 좋아하고 음악공부도 잘 따라했던 게이코씨를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어린이 오페레타(극단)에 권유했다. 이 어린 시절에 체험했던 표현활동이 그 후 게이코씨를 낭독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어린이 오페레타 출연자와 함께.
1956년 1월 28일
추운 겨울 오후였습니다.
히로시마 시내의 어린이들이 노보리쵸중학교※ 에 모여
“원폭 어린이 동상을 만들자!”
학교와 학년을 뛰어넘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피폭하고 10년이 지나서 사망하게 된 사다코씨※ 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1956년 1월 28일
추운 겨울 오후였습니다.
히로시마 시내의 어린이들이 노보리쵸중학교※ 에 모여
“원폭 어린이 동상을 만들자!”
학교와 학년을 뛰어넘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피폭하고 10년이 지나서 사망하게 된 사다코씨※ 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
Story.2
Keiko Shimizu
단바라 초등학교 5, 6학년 때의 담임인 오가타 시즈코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게이코씨의 인생에 변화가 생긴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와 졸업문집을 만들고 있을 때, 오가타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각 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둘이서 다녀오면 좋겠어”
1956년 1월 28일 눈이 흩날리는 추운 날 오후, 노보리쵸중학교에서 가진 모임에는 히로시마 시내 대부분의 초등학교 아동회, 중·고등학교 학생회 멤버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원폭 투하하고 10년이 지나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사키 사다코씨의 동급생※ 이 ‘원폭어린이 동상’ 건립에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고, 참가자 전원 찬성으로 ‘히로시마평화를 구축하는 아동·학생회’ 가 탄생했다. 그 후 게이코씨도 친구와 함께 모임의 일원으로서 모금활동 등 다양한 활동으로 분주해졌다.
이렇게 해서 많은 어린이들의 노력과 그것을 지지하는 어른들의 보이지 않는 서포트에 의해 ‘원폭어린이 동상’ 이 완성되었다. 1958년 5월 5일 제막식 행사에는 당시에 단바라중학교 3학년이었던 15살의 게이코씨도 참석했다.
은사 오가타 시즈코선생님을 회상하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교사 대부분이 전쟁에 나서던 당시, 여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18살의 오가타 선생님도 대용교원으로서 히로시마시 히로세국민학교※ 교단에 섰다. 폭심지로부터 약 1.2 km떨어진 히로세국민학교에서 피폭한 선생님은 거의 전신에 화상과 부상을 입는다.
그 후, 단바라초등학교로 이동하여 게이코씨가 5,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된다.
“선생님은 원폭 후유증으로 몸이 힘들면서도 자주 우리들을 평화자료관에 인솔해 주셨어요. 선생님의 생각은 내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있어요” 1971년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선생님은 사망했다. 췌장암이었다.
어린이들의 힘으로 태어난 원폭어린이 동상
‘히로시마평화를 구축하는 아동·학생회’ 는 ‘원폭어린이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필두로, 기부자에게 감사장 작성, 피폭자 분의 문병, 원폭고아와 장애가 있는 어린이 시설 문병과 위문, 어린이 피폭자 실태조사, 평화학습과 토론 등 폭넓게 활동했다.
“영국과 헝가리 등 해외에서도 기부와 편지를 받았어요. 사무실로 사용한 노보리쵸중학교의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감사장을 썼죠. 히로시마의 어린이들이 시작한 활동이 일본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 나간 거예요”
어린이들의 활동은 영화 ‘천 마리 학’(1958년 제작/기무라 소토지 감독/공동 영화사)에도 담겨있다.
쥬코쿠신문사제공
1958년5월5일 ‘원폭어린이 동상’ 제막식
이 군중 속에 게이코씨도 있다
-
Story.3
Keiko Shimizu
1964년 히로시마현립여자단기대학 국문과 졸업.
1966년부터 히로시마 현청에 근무, 1969년에 결혼 후 퇴직.
행복한 20대를 보냈지만 척수질병 발병,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다. 그리고 가끔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있어도 비교적 건강하게 보낸다.
1996년~1998년, 월드프렌드쉽센터에서 평화 가이드.
1999년부터 영어 낭독극 그룹 ‘오리엔더’에 소속.
60살이 지나 혈액 난치병에 걸리고 폐암도 발병.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게 된다.
게이코씨의 어머니는 전후 3년이 지나 자궁결핵 발생, 60대 후반부터는 직장암, 위암, 간암을 발병, 87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구호피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전에 게이코씨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병을 앓고 33살에 사망한 동생 다케시씨는 사망 후 해부하여 급성백혈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1945년 8월, 피폭자 구호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다케시씨. 이 일과 너무나도 이른 죽음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었을까?
전후 아버지는 피폭자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는 친척을 보고 세 사람의 피폭자 수첩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어머니도 남동생도 많은 질병을 앓았으니까 수첩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은 부담이 덜했을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2004년부터는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에서 낭독 자원봉사를 개시. 2013년~2015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평화학습강사 담당.
2017년부터는 낭독극 그룹 ‘PILE’ 을 주재.
질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게이코씨는 문화적인 접근으로 꾸준한 평화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Story.3
Keiko Shimizu
1964년 히로시마현립여자단기대학 국문과 졸업.
1966년부터 히로시마 현청에 근무, 1969년에 결혼 후 퇴직.
행복한 20대를 보냈지만 척수질병 발병,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다. 그리고 가끔 컨디션이 무너지는 일은 있어도 비교적 건강하게 보낸다.
1996년~1998년, 월드프렌드쉽센터에서 평화 가이드.
1999년부터 영어 낭독극 그룹 ‘오리엔더’에 소속.
60살이 지나 혈액 난치병에 걸리고 폐암도 발병. 입원과 수술을 반복하게 된다.
게이코씨의 어머니는 전후 3년이 지나 자궁결핵 발생, 60대 후반부터는 직장암, 위암, 간암을 발병, 87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구호피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전에 게이코씨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병을 앓고 33살에 사망한 동생 다케시씨는 사망 후 해부하여 급성백혈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1945년 8월, 피폭자 구호 때 어머니 뱃속에 있던 다케시씨. 이 일과 너무나도 이른 죽음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었을까?
전후 아버지는 피폭자에 대한 차별로 고통받는 친척을 보고 세 사람의 피폭자 수첩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어머니도 남동생도 많은 질병을 앓았으니까 수첩을 갖고 있었다면 조금은 부담이 덜했을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2004년부터는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에서 낭독 자원봉사를 개시. 2013년~2015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평화학습강사 담당.
2017년부터는 낭독극 그룹 ‘PILE’ 을 주재.
질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게이코씨는 문화적인 접근으로 꾸준한 평화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원폭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힘으로
‘원폭어린이 동상’ 이 태어난 것처럼
불타버린 들판이었던 ヒロシマ(히로시마)가
살아남은 시민의 힘으로
푸른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은 작은 존재이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들이 만드는 것.
목소리를 높여 행동합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 를 찾아서.
영원한 푸르름 / 하라 다미키
히로시마의 델타에
어린 잎 소용돌이
죽음과 불꽃의 기억에
좋은 기도여 깃들라
영원한 푸르름을
영원한 푸르름을
히로시마의 델타에
푸른 잎 늘어뜨리라
“하라 다미키 시집” 1951.7 ‘작은기도’ (시오분샤)에서
원폭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힘으로
‘원폭어린이 동상’ 이 태어난 것처럼
불타버린 들판이었던 ヒロシマ(히로시마)가
살아남은 시민의 힘으로
푸른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들은 작은 존재이지만
무력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들이 만드는 것.
목소리를 높여 행동합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 를 찾아서.
영원한 푸르름 / 하라 다미키
히로시마의 델타에
어린 잎 소용돌이
죽음과 불꽃의 기억에
좋은 기도여 깃들라
영원한 푸르름을
영원한 푸르름을
히로시마의 델타에
푸른 잎 늘어뜨리라
“하라 다미키 시집” 1951.7 ‘작은기도’ (시오분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