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히로시마, 얼굴

이종근

 

 

나한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 라는 일본이름.
그리고
‘이종근 (李鍾根)’ 이라는 원래 이름.

일본인이 되고 싶어서 줄곧 일본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83살이 되어 피폭자로서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이종근’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이름으로는 피폭자로서의 이야기를 할 수 없거든요.
 

나한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 라는 일본이름.
그리고
‘이종근 (李鍾根)’ 이라는 원래 이름.

일본인이 되고 싶어서 줄곧 일본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83살이 되어 피폭자로서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이종근’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이름으로는 피폭자로서의 이야기를 할 수 없거든요.

 

  • Profile
    Lee Jong Keun

이종근 (李鍾根)

1928년 8월15일, 조선반도에서 시마네현으로 이주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히로시마현 요시와무라(현재의 하쓰카이치시 요시와)로 이사. 사카무라(현재의 아키군 사카쵸) 국민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철도국에 취직. 히로시마 제2기관구 소속이었던 16살 여름에 직장으로 가던 중 폭심지로부터 1.8킬로 떨어진 곳에서 피폭했다.

고물상을 운영하며 ‘에가와 마사이치’라는 일본명(통명)으로 살았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들이 세계 각지의 기항지와 선상에서 피폭을 증언하는 피스보트 선박여행에 참가한 2012년부터 원래 이름인 민족명(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히로시마시의 ‘피폭체험 증언자’ 로서 수학여행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체험을 증언하는 것 외에 피폭자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꾼을 육성하는 히로시마시 사업에도 협력해 피폭자를 대신해서 피폭의 실상을 전하는 ‘피폭 체험 전승자’ 육성에도 노력했다.

또한 한국 거주 피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현 지방본부가 설립한 ‘한국 원폭피해자 대책 특별위원회’ 의 위원장으로도 오랫동안 역임했다.

2022년 7월 30일 맹장암으로 자택에서 서거. 93세였다.

 

 

유년 시절

 

아버지 이학기(李鶴基)는 조선반도 경상남도에 있는 작은 농가 마을에 살았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농민들은 농작물을 공출해야 했다. 원래 부유한 농가였지만 마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수탈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해 어머니 정점봉과 누나를 남겨 두고 1920년에 혼자 일본에 건너왔다.

아버지는 시마네현 히키미초(현 마스다시)에서 숯불구이를 하며 살다가 1925년 어머니와 누나를 불러들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8년에 이종근씨가 태어났고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히로시마현 요시와무라(현 하츠카이치시)로 이사했다.

‘조선인’이라는 것만으로 차별을 받았다. 급우와 분쟁이 생기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벌을 서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냄새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가 씻어서 넣어준 김치가 담긴 도시락을 난로에 데웠다가 창문으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학교에서 하교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느 날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근처 잡화점을 지나가는데 주인 남자가 불러 세웠다. “야 조선인, 이리 와 봐!”. 시키는 대로 도로변에 서 있자 내 발에 오줌을 싼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하자 함께 화를 내야 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일본인이 하는 것에 대해 조선반도에서 온 인간은 거역할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머니・정점봉씨와 이학기씨

유년시절의 이학기씨(오른쪽)와 남동생

동경하던 철도원으로

철도원 시절의 이종근씨(오른쪽)

 

 

철도원이었을 때의 이종근씨

14살이었던 1943년 히로시마 철도국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척들에게 이끌려서 히로시마역에서 본 멋진 증기기관차에 매료되어 기관차 운전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국가 기관이었기 때문에 시험은 어려웠지만 떳떳하게 합격했다. 일본인이 아니라서 채용 여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걱정되었지만 무사히 채용통지가 학교에 도착했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들었다. 교장선생님이 “이것을 가지고 내일 철도국으로 가라” 고 하며 봉투를 건네 주었다. 어떤 내용물인지 도저히 궁금해서 집에서 몰래 뜯어보았다. 그러자 비고란에 ‘조선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채용이 취소될까봐 그 부분을 지우개로 지웠다.

직장은 제2기관고로 히로시마역에서 조금 동쪽에 있었다. 기관고에 들어오는 기관차를 청소하거나 석탄을 보충하는 것이 임무. 일은 즐겁고 좋았지만 일을 시작할 무렵에 살았던 기숙사 생활은 힘들었다. 기숙사 내에서 폭력을 당하고 한창 먹을 나이에 음식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적었던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2년 정도 지난 후에 본가에서 통근하기로 했다. 그 무렵, 부모님은 사에키군 헤라손(현·하츠카이치시)에 살고 있었다. 하츠카이치시에서는 국철로 환승 없이 한 번에 히로시마역까지 갈 수 있었다. 그날 아침도 그 경로로 출근할 예정이었다.

 

 

 

그날

“다리 옆의 피폭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구라시게 유키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고등학교 68 회생 3 학년)
2015년도 제작 소장 :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1945년 8월 6일도 여느 때와 같은 출근길 아침이었다.

출근 전에 입고 갈 옷을 놓고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그 때문에 평소에 이용했던 7시 30분 하츠카이치시를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고 히로덴 전차로 출근하게 되었다. 8시 5분쯤에 폭심지가 된 오오테마치 부근을 통과하여 마토바쵸 전차 정류장에서 내려 고진바시를 막 건너던 그 때였다.

번쩍! 오렌지색 섬광이 눈앞을 지났다. 배운 대로 눈과 코와 귀를 막고 땅에 잠시 엎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방금 전의 섬광이 거짓말처럼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민가와 건물들이 전부 없어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날아가버린 도시락을 주우려고 고진바시 밑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곳에 있던 어른들은 ‘신형 폭탄’ 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어른이 “너, 얼굴 새빨간데” 라고 해서 손으로 만져보니 아팠다. 내가 큰 화상을 입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새빨갛게 화상입은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들.

“도와주세요”

“물 좀 주세요”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못 본 체하면서 지나갔다.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데 무서워서 어느 한 사람한테도 손을 내밀어 도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뛰어서 도망갈 기력도 체력도 있었는데 왜 한 사람도 도와줄 수 없었을까?
여러분이라면 도와주겠죠. 그런데 나는 그때 할 수 없었어요.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걸어서 직장에 도착하니 동료들이 기관차에 쓰는 기름을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그게 아프고 너무 아파서 집에서 쭉 누워있었다.

화상을 입은 데가 살이 썩어 구더기가 끓었다.
어머니는 ‘아이고’ 소리내며 울면서 젓가락으로 걷어주었다.

어느 날 동네 일본인 농가의 할머니가 기름을 가져다주었다. 그 기름을 바르고 순식간에 상처가 나았다. 감사의 말을 하고 싶어도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몰라 그 때 물어보았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목덜미의 구더기를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구보 유리노
(히로시마 시립 모토마치고등학교 68 회생 3학년)
2015년도 제작 소장 :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
몸에 구더기가 생겼다는 부끄러움.

그래서 사람들 앞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내에게도 세 딸한테도 원폭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
몸에 구더기가 생겼다는 부끄러움.

그래서 사람들 앞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던 겁니다.

아내에게도 세 딸한테도 원폭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 후의 생활

 

상처가 아물고 겨우 직장에 복귀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음 해 2월이었다. 얼룩진 화상 자국때문에 동료들은 “가까이 오지 마라, 원폭병이 옮는다” 고 했다. 조선반도 출신의 인간으로서 계속 차별받다가 이번에는 피폭자라는 이유로 또 다른 차별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근무하다 18살이 되었을 때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습기간 동안 받은 일당은 1엔 25전, 그것이 월급제가 되면 월 57엔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직원이 되려면 호적등본을 제출해야 했다. 이유를 대며 제출하지 않자 사무원으로부터 독촉을 받았다.

본국에 청구해서 서면이 올 때까지 2개월.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지만, 조선인이라는 것이 직장에 알려질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동급생의 권유로 운전면허를 취득해 현의 토목출장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단지 피폭자라는 것과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날 것 같아서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자동차 브로커 일을 시작했다. 이와쿠니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중고 미국차를 조달해서 히로시마와 도쿄에서 파는 것은 꽤 괜찮은 장사였다.

40살이 조금 안 되서는 요즘 말로 리사이클 샵 일을 시작했다. 가게이름은 ‘아히루야(오리집)’. 니시히로시마 바이패스 옆에 큰 간판을 세울 정도로 회사가 성장했다. 60살에 은퇴할 때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40살 무렵 맞선으로 아내·노리코와 결혼하여 세 딸을 얻었다.
모두 결혼을 하여 손자도 태어났다.

원폭 위령비의 북쪽, 현재는 평화의 연못이 된 곳에 서 있는 이종근씨(1955년 4월)

청년시절의 이종근씨(맨 앞)

 

아내 노리코씨와의 결혼식 기념사

 

 

 

증언자가 되다

 

2011년 무심코 신문을 읽다가 ‘세계일주 여행·피폭자는 승선 무료’라는 내용의 피스보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공짜로 세계일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응모했는데 선택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면담 때, 그때까지 한 번도 입밖으로 낸 적이 없는 피폭 체험을 이야기했다.

2012년 1월에 요코하마를 출항하는 배에 오른 사람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5명의 피폭자였다. 승객·승무원 1000명 이상, 100일 이상의 선박 여행. 출항 인사를 할 때 자신의 진짜 이름 ‘이종근’ 을 자칭했다. 당연히 그 이름으로 된 한국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1개국 22개 도시에 기항하고 그 중 12개 도시에서 증언을 했다. 선내에서도 말할 기회가 있었다. 몸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피폭자도 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증언 중에 구더기 얘기도 하게 됐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걸 몸소 체험한 내가 얘기 안 하면 안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피스보트에서 귀국한 후 스스로의 체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한국인 피폭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가 등을 떠민 것도 컸다.

2014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운영하는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가 위촉하는 ‘피폭 체험 증언자’가 되었다. 히로시마에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체험과 생각을 이야기하여 2022년까지 8년 동안 증언한 횟수는 288회를 거듭했다. 또 2015년부터는 ‘피폭 체험 전승자’ 양성에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고령을 이유로 사퇴한 2020년도까지 6년 동안 이종근씨와 직접 머리를 맞대고 배워서 전승자가 된 사람은 전국에 17명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를 항행 중인
선내에서의 증언(2012년 4월)

 

미국 반핵 단체의 초청으로 방문한
뉴욕의 고등학교 증언회에서(2013년 4월)

동포들을 위하여

 

2021년 당시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훈장)을 받았다. 상장에는 “재외동포 권익신청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국민포장을 수여한다” 라고 적혀 있다.

미군에 의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희생자는 ‘일본인’ 뿐만이 아니다. 일제 치하에 조선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당시에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징용되었고, 그 중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노동하다가 피폭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사망한 사람뿐만 아니라 종전과 함께 조선반도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인’으로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피폭자로 카운트조차 되지 못하고 사망했다.

1972년 한국인 피폭자가 지원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하자 국가(구 후생성)는 “피폭자는 일본을 출국하면 원호 대상에서 제외된다” 고 통지했다. 이후에도 소송이 이어지고 국가 측의 패소가 계속됨으로써, 국가는 2003년에 겨우 통지를 폐지했다. 한국 등 해외에 있으면서도 수첩과 피폭자 수당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일본에 있는 피폭자와 거의 같은 수준의 원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최초의 제소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였다.

한국 원폭피해자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종근씨는 한국에 있는 피폭자들에 대한 충실한 원호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가해 역사나 일본 정부를 비판하면 같은 피폭자로부터 “왜 일본을 깎아내리느냐” 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8월 5일 평화기념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거행하는 위령제에는 매년 참석했다.

 

 

그날 피폭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반도 출신들은
같은 피폭자이면서
종전을 기점으로 외국인으로서 버려졌고
원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제가 피폭자로서 증언해온 것은,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날 피폭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반도 출신들은
같은 피폭자이면서
종전을 기점으로 외국인으로서 버려졌고
원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제가 피폭자로서 증언해온 것은,
그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원폭으로 화상을 입고 방사능도 맞으면서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나에게는 돌아갈 집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원폭으로 화상을 입고 방사능도 맞으면서
아무도 의지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가사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을 해서 많은 외국인을 죽였다.
젊은 여러분들한테는
그런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
두 번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전쟁을 시작하거나 전쟁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이 소리 높여
핵무기 폐절을 이뤄냈으면 합니다.

 

 

 

 

일본은 전쟁을 해서 많은 외국인을 죽였다.
젊은 여러분들한테는
그런 과거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미래
두 번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전쟁을 시작하거나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는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이 소리 높여
핵무기 폐절을 이뤄냈으면 합니다.

 

사진 이시코 마리

글 미야자키 소노코

협력 미야자키 치요

한국어번역 송 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