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에는 치유와 희망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에는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가 끝없이 갈망하는 세계의 영원한 평화로 통한다.

금에는 치유와 희망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에는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가 끝없이 갈망하는 세계의 영원한 평화로 통한다.

이츠카이치로 피난갔다가 미사사에 들렀던 8월 14일,
히로시마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버린 들판으로 변해 있었고,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에
전소된 집과 공장 터에는 불에 그을린 굴뚝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불안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듬해 봄,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지인 집에서 히로시마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파괴된 건물더미 속에 굴뚝만이 유연하게 서 있었다.
“똑바로 할 일을 해라!”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각오의 원점입니다.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한테 버팀목이 되었던 굴뚝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타버린 공장터에 남아있던 굴뚝
1945년 10월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 촬영/미국 국립 공문서관 제공

▲ 타버린 공장터에 남아있던 굴뚝
1945년 10월 미국 전략 폭격 조사단 촬영/미국 국립 공문서관 제공
이츠카이치로 피난갔다가 미사사에 들렀던 8월 14일,
히로시마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버린 들판으로 변해 있었고,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에
전소된 집과 공장 터에는 불에 그을린 굴뚝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불안으로 가득찼습니다.
이듬해 봄,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지인 집에서 히로시마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파괴된 건물더미 속에 굴뚝만이 유연하게 서 있었다.
“똑바로 할 일을 해라!”
그렇게 말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각오의 원점입니다.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한테 버팀목이 되었던 굴뚝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장에 서 있는 히사나가 히로시씨. 금박지의 빛이 100년 기업의 작업장을 밝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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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Hiroshi Hisanaga
久永 洪( 히사나가 히로시)
1934년 10월 27일, 히로시마시 미사사혼마치(현·히로시마시 니시구 미사사쵸) 출생.
생가는 1905년에 ‘히사나가 세이지로 상점’ 으로 창업하여, 금과 은으로 만드는 맹장지·벽지를 제조하는 ‘레키세이샤’ . 부모님, 할머니, 11살 위의 형과 3살 위의 누나가 있는 여섯 가족이었고, 아버지의 남동생과 어머니의 여동생이 결혼해서 생긴 다섯 가족과 남자종업원 한 명과 함께 살았다. 심상소학교※ 가 국민학교가 된 1941년 봄, 오시바 국민학교(현· 히로시마 시립 오시바 초등학교)에 입학. 전시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가업인 금박지 제조는 1943년에 중단하고, 히로시마 육군 피복지창에 납품하는 포장지 제조로 전환한다.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1945년 7월, 어머니의 고향인 이츠카이치(현 히로시마시 사에키구)로 어머니의 여동생과 그 자녀 세 명과 함께 피난을 갔다. 8월 6일 아침은 이츠카이치 국민학교 교정에서 조례를 마치고 학생들이 대열을 이뤄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서 번쩍하고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였고 폭심지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도 땅이 울리는 굉음이 들렸다.
미사사의 집과 공장은 폭심지에서 2.2㎞. 콘크리트로 만든 굴뚝과 위험물을 보관했던 창고만 남기고 전부 붕괴되고 전소되었다. 아버지 세이지로씨는 중상을 입었지만 어머니 아사노씨에게 구조되었고, 시게할머니는 피난 도중에 쇼크사했다고 한다. 형 세이하치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고, 여학생이었던 누나 사치코는 군대훈련시설에 동원되어 작업중에 피폭되었지만 무사했다.
피난처에서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 불안이 가중될 뿐이었고, 11일에 부모님과 누나가 할머니의 유골을 들고 이츠카이치에 도착해 재회했다. 종전 전날인 14일, 이무로(현·히로시마시 아사기타구)의 지인 집으로 피난가는 길에 초토화된 히로시마가 눈에 들어왔고 공장과 집터에 불에 타다 남은 굴뚝과 창고가 보였다.
1946년 봄, 이무로에서 미사사로 가업을 재건하기 위해 한발 앞서 돌아온 부모님, 군대에서 돌아온 형님과 함께 식량난과 전후의 혼란을 견뎌냈다. 지붕의 방수 시트와 목조선도료 제조로 버티면서, 아버지는 본업인 금박지 제조를 재개할 기회를 엿보았다. 새로운 체제의 중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고교를 졸업한 후에 히로시마대학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진학했지만 공업경영학과로 전과. 대학생활도 끝나갈 무렵, 금박지 제조를 부활시킨 가업을 돕다가 생가가 대대로 일궈온 기술의 탁월함을 알게 되었다.
기술 담당자로서 사장 자리를 이은 형을 지지하면서, 국내외로 판로를 개척한 레키세이샤가 온리원의 기술을 자랑하는 기업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공헌했다. 1981년말에 형이 급사하여 그 뒤를 이어 4대째 사장에 취임했다. 창업 100년이 되는 2005년에 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2024년 10월까지 상담역을 맡았다.
레키세이샤가 계승해 온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그날의 기억 ― 타다 남은 굴뚝과 창고는 현역으로, 전후에 지은 현재의 공장은 피폭된 초등학교의 폐자재를 이용하여 세워졌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것은 열심히 꿋꿋하게 살아온 가족의 역사와 히로시마의 전후 부흥과 발전. 히로시마의 소중한 재산을 쭉 지키고 있다.
◀︎공장에 서 있는 히사나가 히로시씨. 금박지의 빛이 100년 기업의 작업장을 밝게 비춘다
유소년기의 추억
철이 들었을 무렵의 일본은 전쟁의 길을 가속시키고 있었다.
할아버지인 초대 세이지로가 일으킨 공장은 이미 미사사로 옮겼고, 일가가 총출동하여 가업인 금박지 만들기에 애쓰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현재는 주택과 중소 공장이 북적이는 요코가와에서 미사사, 오시바 일대는 쇼와 시대 초기에 공업이 번성한 지역이었다. 오타가와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재목을 모으는 목재보관소가 있었다. 지금도 히로시마를 대표하는 기업인 니시카와 고무공업, 미카사, 몰텐이 창업한 지역이기도 하고, 거기에 관련된 수리와 유지보수를 다루는 철공소도 모여 있었다.
그 주변에는 밭이 넓어 오이와 토마토를 재배했고 연꽃 밭도 많았다. 아침 일찍부터 농가 사람들이 거름으로 쓸 인분을 모으러 다녔다. 전쟁 후에 오타가와 방수로가 된 강은 폭이 좁은 개천이었다.
공장과 붙어 있었던 집에는 대가족이 살았다. 2대째인 아버지 세이지로 , 어머니 아사노, 할머니 시게, 11살 위의 형 세이하치, 3살 위의 누나 사치코. 거기에 아버지의 남동생 시게오는 어머니의 여동생 스에코와 결혼해서 사촌이 되는 아이 두 명이 있었다(종전 해에 셋째 아이가 태어난다). 종업원인 사다모리 사다카즈도 함께 살며 일했다. 밤이면 출입하는 장인들도 어울려 한 되(1.8리터)짜리 병을 놓고 서로 술잔을 나누면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정보를 교환하기 일쑤였다.
유치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동네 절에서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글방에 다니며 스님의 설교를 들었다. 어머니는 어둑어둑한 아침부터 공장에서 사용할 풀을 철제목욕통의 3배 정도나 되는 큰 솥에서 쑤었다. 어머니는 금박지에 매료되어 부모가 권하는 혼담을 거절하고 아버지와 결혼했다. 할머니가 아이 돌보미로 참관일도 아닌데 매일 학교에 왔다.
부모들이 땀을 흘리는 공장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통제경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사치품인 장난감을 사줄 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희귀한 기계와 공구가 있고, 미로처럼 넓은 공장은 숨바꼭질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동네 아이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쪼르륵 몰려 다니다가 종업원한테 “너희들 안돼!” 라고 몇 번이나 혼나기도 했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만들려고 해서 목수와 장인도 많이 찾아왔다. 코흘리개가 목수한테 “비뚤어졌어” 라고 시건방진 소리도 했다.
총력전 체제가 강화되어 심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칭된 1941년, 오시바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 해 12월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된다. 저학년 때는 급식이 있었고 3학년까지는 일상적으로 수업도 했다. 아버지가 ‘노라쿠로’ ‘모험 단키치’ 만화책을 사 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4학년 무렵에는 공습경보 발령으로 귀가를 명령받는 일이 늘었고, 교실 판자를 뜯어내서 마루 밑에 방공호를 만들고 운동장은 개간해서 호박과 고구마를 심었다. 그래서 운동회도 할 수 없었다.
흙이 안 좋은 텃밭에서 딴 호박은 아주 단단했다. 음식이 배급제가 되면서 점점 상에 올라오는 것이 적어지는 것을 아이도 알았다. 흰 쌀밥을 먹을 기회가 사라지고 보리밥이 되었다가, 그것이 죽이 되고, 건더기 고구마도 고구마가 아니라 줄기가 되었다. 고량은 몸에 안 맞아 설사를 했다.
이 전쟁은 좋지 않아 ―. 어린아이면서도 이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어쨌든 일본은 전쟁에 진 경험이 없어 패전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 군대와 같은 스파르타식 교육 교사가 있어서 모두가 문제를 정답으로 답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아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 별을 보면서 하교한 적도 있었다.
가업인 공장 경영도 어려워졌다. 기호품인 금박지는 수요가 없었고, 종업원도 출정했다. 1943년 18살이 된 형이 육군에 소집되었다. 아버지는 육군 피복지창에서 공장 완성품을 싸는 포장지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이를 위한 기계도 직접 만들었다. 얇은 롤 종이를 곤약풀로 5장을 겹쳐서 맞붙이면 베니어판처럼 강하고 내수성도 있는 포장지가 되었다. 겹쳐서 맞붙이는 곤약풀을 증기로 말리기 위해 만든 굴뚝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단단한 원형으로 만들었다.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어 주변에서도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를 나왔을 뿐 전문적으로 기술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밤새 설비를 만드는데 열중하느라 공장 바닥에 깐 멍석 위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45년이 되자 본토결전을 외치게 된다. 자택 공장 지하에는 이웃도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방공호를 파고, 심지어 인근에 있는500평 정도의 땅에도 창고와 방공호를 만들어 공장 물품을 대피시켰다. 시내에서는 공습에 대비해 가옥을 헐고 방화대를 만드는 ‘건물소개’※ 가 급하게 진행되고, 국민학교의 아동은 집단소개※나 연고소개※를 강요받았다. 어머니의 고향 이츠카이치로 대피한 것은 원폭 투하되기 한달 전이었다.

1943년 촬영. 할머니 시게를 중심으로 동거하는 두 가족.
오른쪽 6명이 장남 세이지로의 가족
(앞줄 오른쪽부터 아내 아사노, 언니 사치코, 히사나가 히로시씨, 할머니 시게.
뒷줄 오른쪽부터 아버지 세이지로, 형 세이하치)
왼쪽 4명이 차남 시게오의 가족
(앞줄 오른쪽부터 헤이지와 마스코, 뒷줄 오른쪽부터 시게오와 아내 스에코)
1943년 촬영. 할머니 시게를 중심으로 동거하는 두 가족.
오른쪽 6명이 장남 세이지로의 가족
(앞줄 오른쪽부터 아내 아사노, 언니 사치코, 히사나가 히로시씨, 할머니 시게. 뒷줄 오른쪽부터 아버지 세이지로, 형 세이하치)
왼쪽 4명이 차남 시게오의 가족
(앞줄 오른쪽부터 헤이지와 마스코, 뒷줄 오른쪽부터 시게오와 아내 스에코)
8월 6일
군항이 있는 구레가 공습으로 불타고 다음은 히로시마가 아닌가? 그 두려움 때문에 대피해서 간 외가는 이츠카이치의 고센지라는 고찰 문 앞에 있었다. 히로시마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 어머니의 여동생인 스에코(아버지의 동생 시게오의 아내) 와 그의 자녀 3명과 함께 5명이 피난갔다. 일이 있는 부모는 미사사에 남아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의 이츠카이치는 논밭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먹을 것이 풍부했던 것은 아니다. 피난온 가족을 받아들였으니 더욱 그랬다. 그 무렵, 형 세이하치는 육군에서 식량보급을 담당하는 임무로 오카야마에 있었고, 누나 사치코는 현립 히로시마 제2고등여학교에 다녔다.
이츠카이치는 바다와 가까워서 히로시마만 끝에 있는 구레가 공습받는 불길이 보였다. 미군기 그라만이 해안을 선회하며 날아간다. 이거, 어쩔 도리가 없어. 어린아이도 알았다.
8월 6일은 월요일이어서 교정에서 조례를 마치고 대열을 이뤄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작은 산 너머에서 번쩍하고 빛이 났다. 구름이 엄청난 기세로 푸른 하늘을 가로줄 모양으로 흘러갔다. 콰앙 하는 폭음과 땅울림이 울려 퍼지자 선생님이 ‘엎드려!’ 라고 외쳤다. 순간적으로 눈과 귀를 손으로 막고 엎드렸다. 조심조심 눈을 떠보니 목조로 된 교사건물 2층에서 깨진 유리창이 떨어져서 다친 아이도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먼지투성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히로시마에 큰 폭탄이 떨어진 것 같다. 청소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라” 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오전 10시쯤이었을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굵고 검은 비가 내려 안뜰을 적신 기억이 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밖에 몰랐다.
잠시 후 집 뒷문에서 “물 좀 주세요” 하고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모르는 여자였는데 머리는 덥수룩하게 흐트러지고, 얼굴은 먼지로 거무스름하고 유령같았다. 팔의 피부가 화상으로 벗겨져서 흐늘흐늘거리고 있었다.
차를 태워줘서 이츠카이치까지 다다른 것일까? 잠시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집안 누구도 입뻥끗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였다. 어른도 연락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배고픔에 시달렸는데 낮이 되어도 입맛이 전혀 없고 차를 마시며 지내기만 했다. 미사사의 부모님은, 언니는, 시게오 삼촌은 괜찮은가? 그날은 밤이 되어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어도 히로시마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다. 학교도 휴교였다. 어떻게 되는 거야? 어른들이 소근소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바스락거리기만 했다. 이틀이 지난 8월 8일, 어머니의 오빠와 스에코는 안절부절못하고 둘이서 히로시마로 향했다. 고이역(현 니시히로시마역)까지 기차를 타고 불에 탄 들판을 바라보며 각오했다고 한다. 땡볕을 걸어서 다다른 미사사에서 본 것은 굴뚝과 창고의 일부를 남기고 통째로 불에 탄 집과 공장이었다. 가족과 종업원의 행방도 모른 채, 저녁 무렵에 기운없이 이츠카이치로 돌아왔다. 귀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장의 굴뚝은 원폭 폭풍과 맹렬히 타오른 불길을 견디고 남아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히로시마의 참화와 부흥의 증인이기도 하다.

공장의 굴뚝은 원폭 폭풍과 맹렬히 타오른 불길을 견디고 남아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히로시마의 참화와 부흥의 증인이기도 하다.
부모님과의 재회

할머니 시게와 아버지 세이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학도동원 작업으로 히로시마역 북쪽에 있는 훈련장에 있었던 누나도 살았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3일 후인 8월 9일이었다.
그날도 스에코는 단서를 찾으러 히로시마에 갔다. 삼촌 시게오는 건물소개 작업으로 히로시마 시청과 가까운 자코바마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불에 탄 시체가 포개어져서 시게오를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도중에 미사사에 들러보니, 누나 사치코의 전언이 판자 조각에 검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종업원 모리모토 료이치와 나가츠카에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종업원 한 명이 산을 넘어 이츠카이치에 찾아와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고 전해주었다.
그날 집과 공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중에 들은 얘기는 이렇다. 아침부터 아버지 세이지로는 공장 3층에서 육군 피복지창에 전달할 시제품 포장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섬광과 굉음. 공장 흙벽이 무너지고 유리 파편이 왼쪽 위 팔을 도려냈다. ‘도망가!’ 라고 종업원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출혈이 심해서 의식이 멀어져 갔다. 간신히 집 부엌에 이르자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본 할머니 시게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 아사노는 빈사상태의 아버지를 껴안고 종업원 사다모리 사다카즈에게 시게를 데리고 도망가도록 부탁한다.
“난 이제 됐어. 이 공장과 운명을 같이 한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억지로 침구요에 태워서 끌고가면서 비상 휴대용 가방을 어깨에 매고 오시바 국민학교로. 학교에서 빌린 들것에 아버지를 싣고 피난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북쪽으로 향했다. 후루이치(현·히로시마시 아사미나미구)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나서 아버지를 마차에 태우고 어머니는 걸어서 가베(현·히로시마시 아사키타구)로 따로 헤어져서 도망갔다. 오후 8시경 가베에 도착한 어머니는 구호소가 된 절을 돌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았고 세 번째 가츠엔지에서 겨우 발견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을 쥐자 천천히 숨을 쉬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큰 짐수레로 옮기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중상을 입은 아들을 본 쇼크사였을까?
8월 11일 오후, 초라한 모습의 부모님과 누나, 종업원 사다모리가 이츠카이치로 왔다. 아무 말도 못했지만 기뻐서 울었다. 목욕을 하고 침착해졌다. 할머니는 이미 화장을 해 유골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 이무로(현·히로시마시 아사키타구)의 지인, 사사키가에 신세를 질 것을 부탁했다. 언제까지고 이츠카이치에 있을 수 없었다. 8월 14일 아침, 이무로를 향해 출발했다. 이츠카이치에서 고이까지는 기차로 가고, 그 다음부터는 걸어서 미사사로. 거기서 처음으로 불에 탄 들판이 된 시내를 둘러보았다. 남쪽으로는 니노시마가, 동쪽으로는 히로시마역이 보였다.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사체에 구더기가 피어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미사사까지 오니 굴뚝 한 개와 위험물을 넣어두었던 창고만 남아 있고 모두가 불에 타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안할 뿐이었다.
오로지 북쪽을 향해 걷다가 도중에 트럭을 태워줘서 오후 7시경 가베에 도착했다. 이런 때에도 아버지는 조모의 첫 추석인 것을 잊지 않았다. 작은 불단과 불구를 구입했다. 긴급시를 대비해 복대에는 돈다발을 넣어 두었다. 이무로에 도착한 것은 오후 9시경. 사사키가가 있는 곳은 불과 9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에 반딧불이 많이 보였다. 대낮에는 지옥화와 같은 초토를 벗어나 밤에는 환상적인 빛의 춤. 어둠 속에 죽은 자를 진혼하는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무로로 향하는 도중에 구입한 불단은 지금 히사나가 히로시씨의 집에 있다
금박지는 히로시씨가 직접 붙였다
이무로로 향하는 도중에 구입한 불단은 지금 히사나가 히로시씨의 집에 있다
금박지는 히로시씨가 직접 붙였다
삶을 되살리다
8월 15일 오후에 뭔가 중대한 발표가 있는 것 같았다.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던 이무로의 사사키집에는 마을 어른들이 모여 있었다. 산이 깊은 곳에서는 음성을 듣기가 어렵다. 처음 듣는 천황 폐하의 목소리. 모두가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진 것이다.
이무로에서의 생활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아이에게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마을과 달리 시골은 먹을 것이 있어서 좋았다. 가을이 깊어지면 떨어지는 밤과 감을 주워 먹었다.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가을이 깊어지고 나서였다. 부상한 피폭자를 수용하고 있었던 이무로의 초등학교가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끝내고, 마을에 분산되어 있었던 교실에서 의자와 책상을 등에 메고 산을 넘어 학교로 향했다. 수업다운 수업은 없었다. 선생님들도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몰라 반나절 정도가 지나면 하교했다.
산을 넘는 통학은 편도 1시간 반. 직접 짠 짚신은 이틀 만에 망가졌다. 비포장된 산길은 겨울에는 미끄러워서 힘들었다.
아버지 세이지로의 상처는 점차 아물었고 가을에는 형 세이하치가 제대해서 돌아왔다. 생활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육군의 군량보급창에 배속되어 있었던 형은 군 물자를 잘 알고 있어서 우지나와 오타케, 구다마츠에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눈에 띈 것은 두루마리의 두꺼운 종이. 코르타르를 바르면 지붕 방수시트를 만들 수 있다. 부흥에 도움이 되겠다는 조건으로 불하받아 1946년 새해 벽두에 부모님과 형은 미사사로 돌아갔다. 불에 탄 터의 방공호를 침소로 삼아 불에 탄 들판에서 공구를 모으면서 조업 재개준비를 시작했다. 살아남은 가족 모두가 살 수 있도록 판잣집을 지었다.
이무로를 떠난 것은 3월 31일. 미사사에서는 판잣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틈새바람이 몸에 스며들었다. 이른 아침에는 “3번선, 도쿄행 발차” 하고 2km 이상 떨어진 히로시마역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타다 남은 굴뚝이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땅에서 다시 살아가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우선 먼저 직면하게 된 것은 식량난이었다. 이무로에서 쌀은 받았지만 8명이 사는 가족에게는 충분한 양이 아니었다. 전쟁중과 마찬가지로 다진 고구마 줄기와 명아주 등 잡초를 넣어 죽의 양을 늘렸다. 농가에서 받은 호박 씨를 뿌렸지만 공장의 폐자재와 지붕 기와가 묻힌 땅을 일구는 것은 고된 작업이었다. 땅을 깊게 파서 잔해를 묻고, 또 파서 묻고 했다. 땅을 높이 쌓아 올려 논을 만들고, 제자리에 서서 물레방아로 물을 끌어올리면 녹초가 되었다. 50평가량의 논밭을 일구면서 콩과 감자, 야채를 재배했고, 닭과 토끼도 키우며 자급자족 생활에 쫓겼다.
배급제도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군 물자였던 밀가루와 건빵, 별사탕이 손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밀가루로 만든 우동은 최고로 맛있었다. 아이들이 먹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은 음식을 먹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요코가와역과 히로시마역에는 암시장이 서고 쌀겨와 잡초를 섞은 에바당고도 자주 팔았다. 맛있지는 않았지만 한 사람이 몇 개까지 살 수 있는 지 개수가 정해져 있었다.
정들었던 오시바초등학교 6학년에 복귀했다. 교사는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었지만, 원폭으로 지붕과 유리창이 날아가 버려 교실에서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이 보였다. 제대로 된 수업은 없었다. 아이들은 집안일을 돕느라 바쁘고 먹을 것도 없으니 점심시간 전에는 하교. 우선 먼저 교과서 먹칠부터 시작되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웠지만, 그 사이에 익숙해졌다. 교육방침이 정해지지 않아 선생님도 곤란했을 것이다. 전쟁 시의 선생이 남아 있어서 군대식 교육이었던 명령조가 없어지지도, 공부다운 공부도 하지 못하고 졸업사진도 찍은 기억이 없다.
학제개혁으로 새로운 체제의 중학교가 생긴 1947년 봄, 히로시마시의 제5중학교에 입학했다. 독립된 교사는 없었고 철근 콘크리트였기 때문에 불에 타다 남은 후쿠로마치 초등학교의 3층을 세내어 공부했다. 벽은 없어졌고 바닥도 덜컹덜컹. 사나운 날씨에는 비가 들이닥쳤다. 교복도 없고 교과서도 없었다. 의자는 학생이 만들었고 화판이 책상을 대신했다. 피난갔다 돌아오거나 해외에서 철수해서 돌아오기도 해서 날로 학생 수가 늘었다. 남자 선생님이 3명 있었다. 스탠딩 칼라 차림의 졸업한 지 얼마 안된 선생은 “부기란 BOOK KEEPING이라고 한다” 고 말문을 열어서 깜짝 놀랐다. 그 선생님의 수업은 한 번으로 끝났다. 옛 체제의 히로시마 제1중학교(현 히로시마 고쿠다이지 고교)에서 왔다는 화학 선생님은 갑자기 원자량과 분자량 수업을 시작해 물의 분자량을 계산하라고 숙제를 내주니 난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제대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면서도 공부도 굶주려 있었다. 친구와 혼도리의 서점을 돌아다니며 긴쇼도에 너무 오래 있다고 점원에게 혼나면 다음은 고분칸으로, 또 혼나면 다음으로. 어떻게든 답을 끌어내려고 했다.
7월경에는 영어 교과서가 도착했지만, 학생 전원에게 돌아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친구에게 하루를 빌려 책 1권을 통째로 노트에 필사했다. 그러자 모르는 대로 법칙 같은 것이 보이고 영어 이미지가 생겼다. 난학사시※ 를 배운 옛날 사람들은 이런 식이었을까? 전후 결핍 상태 속에서의 배움은 스스로 공부해서 답을 찾는 ― 즉 자립교육. 몸에 밴 습관은 그 후의 인생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후쿠로마치 초등학교에 세들어서 공부했던 제5중학교 시절
앞에서 두번 째 줄 왼쪽 끝이 히사나가 히로시씨
기사회생
후쿠로마치에 있는 제5중학교에 다닌 기간은 짧았다. 학생수가 늘기만 해서 학교를 3개로 나누어 지금의 노보리마치중학교와 고쿠타이지중학교, 나카히로중학교가 탄생했다. 2학년이었던 1948년부터 노보리마치에 새로 생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미사사 다리를 건너 하쿠시마를 지나면서, 공장이 많은 동네 미사사와 유복한 집이 많았던 노보리마치와 차이를 느꼈다. 주택난을 대처하고자 육군용지였던 모토마치에 단층집을 많이 지었다. 나중에 고층 공영 주택이 들어선 일대이다.
이제는 영어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브라질에서 돌아온 친구한테서 나가레카와 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듣고 3개월 정도 다녀 보았다. 친구는 물을 ‘와라, 와라’ 라고 발음했다.
에바 경단을 사러 갔을 때, 지프차에 탄 진주군 헌병대(MP)가 말을 걸었다. “이 근처에 있는 성당을 아나 ?하고 물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병사였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지프차에 태워 “안내하라”고 했다. 종교적인 것이 배경에 있는건지, 진주군은 성당을 찾아서 물자를 날라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처음 초콜릿을 받았다. 장교 모자를 쓴 병사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죽구두 밑창에 성냥을 긋는 것에 놀랐다. “신발 밑창에 긋기만 해도 불이 붙으니 이거 전쟁도 지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1950년 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설립된 고등학교인 시립 모토마치 고등학교에 응시했지만, 생각을 바꿔 중학교와 고교가 일관된 사립 명문고 슈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가업은 여전히 빈곤에 쪼들렸지만 슈도 동급생에게는 부자가 많았다.
가업으로 지붕 방수시트를 만드는 일은 반년이 지난 1946년 가을에 끝났다. 재료로 쓰이는 두꺼운 종이가 없었던 것이다. 자 다음은 어떻게 하나? 하고 아버지 세이지로와 형 세이하치가 고심하고 있을 때, 자재에 밝은 브로커한테 가솔린 대용품으로 쓰고 남은 송근유로 도료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형은 조사와 연구를 거듭해, 나무에 바르면 방수와 방부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조선 배 바닥에 바르는 도료를 만들게 되었고, 요시지마 형무소 근처에 공장을 세웠다. 형을 사장으로 해서 회사도 번성하게 되었고, 우지나와 키에, 오노미치, 구다마츠 등의 항구도시에 판매하러 다녔다. 이 무렵에는 가업 일은 기술자를 고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 일을 돕는다고 하면 농사일이었다.

사원들과 함께 찍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히사나가 히로시씨.

1954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 수출 전시회에 출전

1956년 작성
‘롱롱’ 견본책 표지와 내용
페인트는 순조롭게 팔려서 생활도 좋아졌지만, 그 사이에 대기업의 페인트 회사가 부활했다. 언제 금박지 제조를
재개할 것인가? 이 생각이 아버지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1950년에는 30평의 공장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일시 귀국한 미사사 출신의 일본계 2세로부터 “미국에서는 가정집에 벽지를 많이 붙이고 있다. 금박지도 팔릴 것 같다” 라는 말을 듣고서 아버지는 견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재료와 도구는 여전히 질 좋은 것으로 갖출 수 없었고, 고심해서 만든 금박지도 ‘잘 찢어진다’ 라는 불평을 들었다. 금박 대신 금가루를 스프레이 방식으로 종이에 뿌려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휴일 없이 만들어서 ‘평화금’ 이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고충이 접수되었다. 접으면 금가루가 벗겨진다는 것이었다. 실패작이었다
이 위기를 구한 것은 두 가족(남편끼리 형제=남동생은 피폭사=, 아내끼리 자매)으로, 아이를 포함한 전원이 일치 단결해서 하루라도 빠른 성공을 기원하며 금박지를 만들면서 틈틈이 자급자족을 위해 농사를 짓는 생활이었다.
역시 본래의 금박이나 은박을 사용한 양질의 상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 무렵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상황도 있어서 국내 부흥이 가속화되었다. 도쿄의 도매상과 상담하여 견본책을 만들어 보았지만, 구매 상대가 사찰 정도라서 이대로는 장사가 될 수 없었다.
1953년, 도료가 기회라고 생각했던 형은 금박지 제조에 복귀했다. 아버지는 옥신각신하며 금박지를 만들었지만, 그 사이에 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진다. 현청과 시청에 출입하고 있었던 형은 국내가 안 된다면 국외로, 라는 생각으로 중소기업 물품을 소개하는 국제 수출전시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다음 해에 오사카에서 전시회가 개최되어 히로시마현의 부스에 출전했다. 전시회장을 방문한 미국 바이어가 미술관과 박물관에 있는 낡은 금병풍같은 금박지를 만들 수는 없냐고 물었다. 그것을 힌트로 박과 박의 경계선을 궁리해서 세로와 가로의 선으로 악센트를 주어 옛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상품을 만들었더니, 이것이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대인기였다. ‘히사나가’ 의 의미는 ‘길고 길다’ 이다. ‘롱롱’ 이라고 이름 붙여서 기사회생한 제품은 끊어져 가는 가업을 구하고 히로시마의 금박지 제조의 전통도 구하게 되었다.

회사를 이어받고
여전히 가업이 곤경에 처한 가운데 대학입시를 맞이했다. 교토대학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여 1년동안 가업을 돕다가 1954년 봄에 히로시마대학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업은 여전히 안정되지 않아 반년을 다니다가 휴학했다. 1년 뒤에 복학할 때는 원래 다니던 학과가 아닌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했다. 물건을 제조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전후에 들어온 새로운 경영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전후가 아니라는 시기에 대학 친구들은 유명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가업은 1954년에 ‘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로 하여 법인으로 개편하고, 전년도에는 80평의 공장도 증축했다.
형 세이하치는 착실하게 회사를 잘 유지하고 있어서 내가 가업 일에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망설임을 털어버린 만남이 있었다. 내수성이 있는 색종이를 만드는 오사카의 한 회사에 조언을 듣고자 찾아갔을 때, 회사 사장님은 젊은 시절에 금박지를 만들려고 하다가 몇 번이나 실패한 체험담을 들려 주었다. “너희 회사의 기술은 대단해”. 그 말에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워졌다. 또한, 오사카·신가부키자의 건설공사에서 금박부착 의뢰가 있었고, 거기에서 건축가 무라노 토고씨의 설계에 의한 금은 장식의 눈부신 세계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나서 마음이 정해졌다. 대학을 졸업하면 가업인 회사에 입사해서 판매, 기획,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형을 도와 제조와 기술개발 분야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전후 부흥에서 고도 성장으로 가속화하는 시대, 고품질 상품으로 판로를 국내외로 확대해서, 고급 호텔과 유명한
신사의 불각, 미술관, 공항 VIP룸, 공공 시설 등의 일을 차례차례로 작업했다. 회사는 1962년에 ‘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로 개칭하고(후에 ‘레키세이샤’), 형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12월, 무역 진흥에 공헌하여 11월에 자수 포장※ 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은 5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4대째 사장으로 취임하여 초대·세이지로의 창업에서 100년이 지난 2005년까지 근무했다. 전통과 혁신을 가슴에 안고 신상품 개발에 과감히 도전했고, 그것을 위한 기계 개발이나 기구 조정은 모두 내 몫이었다. 인생에서 길러진 자립심이 그 근저에 있었다.
사장 재임중에 잊을 수 없었던 사건 하나가 1990년에 방문한 뉴욕 유엔 본부. 그 안에 들어가자 직경 30센치 정도의 기둥이 20개 정도 늘어서 있었고, 붙여진 금박은 낡았으면서도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본회의장에 들어서자 번쩍이는 금빛의 커다란 벽면에 유엔 문장이 보였다. 인류가 오래 전부터 소중히 여긴 금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다. 치유와 희망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에는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로 통하는 것이다.

◀︎작업에 몰두하는 젊은 날의 히사나가 히로시씨
눈부신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유엔 본부의 본회의장 UN Photo/Manuel Elias
회사를 이어받고

눈부신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유엔 본부의 본회의장
UN Photo/Manuel Elias
여전히 가업이 곤경에 처한 가운데 대학입시를 맞이했다. 교토대학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여 1년동안 가업을 돕다가 1954년 봄에 히로시마대학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업은 여전히 안정되지 않아 반년을 다니다가 휴학했다. 1년 뒤에 복학할 때는 원래 다니던 학과가 아닌 공업경영학과로 전과했다. 물건을 제조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전후에 들어온 새로운 경영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전후가 아니라는 시기에 대학 친구들은 유명 기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가업은 1954년에 ‘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로 하여 법인으로 개편하고, 전년도에는 80평의 공장도 증축했다.
형 세이하치는 착실하게 회사를 잘 유지하고 있어서 내가 가업 일에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망설임을 털어버린 만남이 있었다. 내수성이 있는 색종이를 만드는 오사카의 한 회사에 조언을 듣고자 찾아갔을 때, 회사 사장님은 젊은 시절에 금박지를 만들려고 하다가 몇 번이나 실패한 체험담을 들려 주었다. “너희 회사의 기술은 대단해”. 그 말에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워졌다. 또한, 오사카·신가부키자의 건설공사에서 금박부착 의뢰가 있었고, 거기에서 건축가 무라노 토고씨의 설계에 의한 금은 장식의 눈부신 세계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나서 마음이 정해졌다. 대학을 졸업하면 가업인 회사에 입사해서 판매, 기획, 경영을 담당하고 있는 형을 도와 제조와 기술개발 분야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전후 부흥에서 고도 성장으로 가속화하는 시대, 고품질 상품으로 판로를 국내외로 확대해서, 고급 호텔과 유명한
신사의 불각, 미술관, 공항 VIP룸, 공공 시설 등의 일을 차례차례로 작업했다. 회사는 1962년에 ‘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로 개칭하고(후에 ‘레키세이샤’), 형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1981년 12월, 무역 진흥에 공헌하여 11월에 자수 포장※ 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은 5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4대째 사장으로 취임하여 초대·세이지로의 창업에서 100년이 지난 2005년까지 근무했다. 전통과 혁신을 가슴에 안고 신상품 개발에 과감히 도전했고, 그것을 위한 기계 개발이나 기구 조정은 모두 내 몫이었다. 인생에서 길러진 자립심이 그 근저에 있었다.
사장 재임중에 잊을 수 없었던 사건 하나가 1990년에 방문한 뉴욕 유엔 본부. 그 안에 들어가자 직경 30센치 정도의 기둥이 20개 정도 늘어서 있었고, 붙여진 금박은 낡았으면서도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본회의장에 들어서자 번쩍이는 금빛의 커다란 벽면에 유엔 문장이 보였다. 인류가 오래 전부터 소중히 여긴 금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다. 치유와 희망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에는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히로시마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로 통하는 것이다.

▲작업에 몰두하는 젊은 날의 히사나가 히로시씨


육군 피복지창에서 수주 생산한 군복 포장지. 그 제조를 위해서 자기부담으로 기계를 만들고 굴뚝도 세웠다. 그것에 깃든 것은 전쟁의 기억. 지금 ‘롱롱’이 발하는 금빛이 히로시마 부흥과 함께 한 히사나가 히로시씨의 인생을 비춘다

세로 가로 방향으로 주름을 넣어 신축성이 좋은 피복지창의 포장지

포장지를 만들기 위해 직접 제작한 기계

‘롱롱’ 제작을 시작한 초기의 풍경


육군 피복지창에서 수주 생산한 군복 포장지. 그 제조를 위해서 자기부담으로 기계를 만들고 굴뚝도 세웠다. 그것에 깃든 것은 전쟁의 기억. 지금 ‘롱롱’이 발하는 금빛이 히로시마 부흥과 함께 한 히사나가 히로시씨의 인생을 비춘다

세로 가로 방향으로 주름을 넣어 신축성이 좋은 피복지창의 포장지

포장지를 만들기 위해 직접 제작한 기계

‘롱롱’ 제작을 시작한 초기의 풍경
미래의 재산
시대의 격변을 겪고도 살아남은 것은 금박지가 가진 힘이었다.
대형시설의 내장에서 주택 인테리어, 다양한 아티스트의 소재. 제조 과정에서 생기는 단재조차도 상품으로 바꿔서
커피와 검은 콩에 더하게 되면 검은 빛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100년 기업은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문화의 저변을 넓혔다.
문화를 만드는 것은 단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 의뢰가 있으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요구에 응답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고, 그것이 인재와 기술, 디자인 등의 경험치를 높여 품질을 향상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만이 할 수 있는 것” 을 만들어 내고, 온리원 기업으로서 걸어 왔다.
진취정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서도 소중히 지켜온 것은, 핵무기로 인한 참화라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고난을 겪으며
히로시마 사람들과 부흥을 함께 했다고 하는 정체성이다. 폭풍과 화염을 견뎌낸 원기둥형 굴뚝은 공장의
환기용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고, 불에 탄 창고도 현역으로 히로시마시의 피폭 건물 리스트에 등록되어 있다.
굴뚝과 창고를 둘러싸듯이 지은 공장은 1959년 기온마치(현·히로시마시 아사미나미구) 초등학교에서
폐자재를 인수해서 만들었다. 그 여름, 일가가 북쪽을 향해 도망쳐 가는 길에 있던 초등학교의 체육관과 계단의
부재이다. 회사 쇼룸에 들어갈 때, 현관 앞에서 눈에 들어오는 화강석은 예전에는 일본의 전통적인 큰 조명의
받침대였다.
재산은 온리원 기술뿐만이 아니다. 원폭을 견디고 살아온 기억을 미래에 남겨두는 것도 큰 사명이다.
불에 탄 그 허허벌판에서 여기까지 잘 부흥해 왔구나-.
그 감회에는 스스로의 삶과 가족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히로시마가 걸어온 세월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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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키세이샤
Rekiseisha
히로시마가 자랑하는 온리원 기업. 일본의 전통공예기술인 금박누름을 이용한 금박지 제조의 장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2025년에 창업 120년이 된다.
마치 진짜 금박처럼 오래 사용해도 변색되지 않고, 또한 실용성도 뛰어난 금박지. 신사 불각, 황실, 카르티에와 티파니 등의 브랜드샵, 국내외의 고급 호텔, 도쿄 스카이 트리, GINZASIX(긴자식스), 아카데미상 회장과 영화 세트 – 내장을 수놓는 금빛, 그것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품화한 레키세이샤의 역사는 1905년에 창업한 ‘히사나가 세이지로 상점’ 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 히사나가 세이지로의 생가는 아사노죠 밑에서 도검상을 오랜 세월 동안 꾸려 왔다. 장사의 전환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1876년에 발령된 폐도령때문이었다. 출입하고 있었던 무인 집안의 저택 조도품에 주목해 금은 병풍을 매매하기 시작했는데 쿄토에서 구입한 본금과 본은 병풍은 고가였다. 그래서 놋쇠로도 색이 변하지 않고, 실제 사용해도 견딜 수 있는 금박지를 만드는 일에 도전해 접착제 등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1925년에 ‘양박 압지 제조 방법’ 으로 특허 인증을 받아, 1928년에는 창업의 땅·호리카와쵸(현·히로시마시 나카구)에서 미사사혼마치(현·히로시마시 니시구)로 이전했다. 전시통제의 영향으로 1943년에 금박지 제조를 중지하고, 전시 중에는 육군 히로시마 피복지창에서 제조되는 군복의 포장지를 시작하게 된다.
1945년 8월 6일 원폭 투하로 인해 공장이 소실되어 어쩔 수 없이 조업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전후에는 지붕용 방수지 제조로 사업을 재개했다. 새롭게 수출용 금박지 제조에 주력하고, 벽지 ‘롱롱’시리즈가 히트하며 해외시장에 진출. 1954년에 유한회사 ‘広島瀝青社(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를 설립해서, 1962년에 ‘広島歴清社 (히로시마 레키세이샤)’ 로 개칭, 1979년에 주식회사 ‘歴清社 (레키세이샤)’ 가 된다.
레키세이샤는 발전과 고난의 기억을 새긴 땅에서 조업을 계속하여 일본의 미의식을 상징하는 박 문화를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창조성으로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1935년에 완성된 5층건물 공장

1935년에 완성된 5층건물 공장



종업원들이 묵묵히 손을 움직이면서 금박을 붙여간다.
정성스러운 작업이 온리원 제품을 만들어 낸다
제공 아사히신문사 2005년 촬영

1925년에 취득한 특허증이 히로시마의 금박지 제조의 주춧돌이 되었다

1925년에 취득한 특허증이 히로시마의 금박지 제조의 주춧돌이 되었다

피폭된 쇼룸 앞의 큰 등롱 받침대
◀︎종업원들이 묵묵히 손을 움직이면서 금박을 붙여간다.
정성스러운 작업이 온리원 제품을 만들어 낸다
제공 아사히신문사 2005년 촬영

